대통령실에도 냄새가 날까?···‘향, 균, 쇠’ 숨겨진 세계와 마주하다

이영경 기자 2024. 10. 23.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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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인간 존재’와 공존 다룬 동시대 미술
리움미술관 아니카 이 ‘또다른 진화가 있다···’
부패하는 꽃·미생물·AI 다룬 작품 등 선보여
코끝을 찌르는 쿰쿰한 냄새 “냄새는 정치적”
남서울미술관 ‘제9행성’ 광주비엔날레도
인간 중심적 사고 벗어난 비인간 존재 주목
아니카 이 ‘산호 가지는 달빛을 길어 올린다’(2024)의 한 장면. 아니카 이 스튜디오의 10년간 작업을 인공지능이 학습해 생성한 영상이다. 리움미술관·글래드스톤 제공

인간의 몸 절반 이상은 ‘나’ 아닌 것으로 구성돼 있다. 우리 몸속엔 박테리아가 38조개, 바이러스가 380조개 있으며, 인체의 57%는 몸에 사는 미생물로 구성돼 있다. 제러미 리프킨은 <회복력 시대>에서 ‘생태적 자아’의 출현을 말한다. 인간이 외부·환경과 분리된 ‘독립적 존재’라는 생각은 이제 더 이상 자명하지 않다. 김초엽은 장편소설 <파견자들>에서 곰팡이에 점령당한 지구를 그리며 곰팡이가 인간과 맺는 복잡한 관계를 그려 보인다. 주인공은 ‘범람체’라 불리는 곰팡이를 자신 안에 있는 새로운 존재로 받아들이며 ‘나’라는 존재의 경계를 허물고 확장한다.

기후변화 등으로 인한 전지구적 위기 속에서 인간의 삶 또한 흔들리는 가운데 인간 중심주의를 벗어나 동식물·미생물 등 ‘비인간 존재’와의 공존·공생을 모색하는 작업들이 학문과 예술 분야에서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현대미술계에서라면, 아니카 이의 존재감이 독보적이다.

리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 아니카 이. 사진촬영 이재안. 리움미술관 제공
냄새, 균, 기계로 구성된 ‘아니카 월드’

박테리아, 효모, 부패하는 꽃, 해조류, 인공지능(AI)…. 서울 용산구 리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아니카 이의 개인전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12월29일까지)에는 ‘인간 아닌 것’들이 가득하다.

발효되는 빵반죽, 꽃에 밀가루를 입혀 튀긴 후 레진을 입혀 만든 조각, 해파리와 산호 등 해양생물의 형광단백질을 지닌 유전자조작 대장균, 박테리아와 효모가 만나 형성된 걸쭉한 스코비(콤부차의 원료)와 같은 유기물이 한쪽에 있다면 빛을 발하며 움직이는 기계 방산충, 인공지능이 만든 영상과 회화 등 무기물이 다른 한쪽에 있다. 미생물부터 AI까지, 아니카 이는 인간과 함께 세계를 구성하고 살아가는 존재들을 기꺼이 협업자로 초청해 예술적 자아를 확장해나간다.

“미생물, 박테리아, 기계 등 비인간 존재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인간 예외주의의 제한된 틀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생물을 연구하면 우리의 인식 밖에 존재하는 상호작용, 의사소통, 생존 전략 등 숨겨진 세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미생물은 인간의 틀을 넘어선 큰 관계망의 일부로 존재하는데, 이는 주체성과 자율성에 대한 우리의 사고방식에 도전합니다. 반면 기계, 특히 AI는 인간과 다른 사고방식을 지녔어요. 인간과 비인간, 생물학과 기술, 자연과 인공물 사이의 대화를 확장하는 공생적 교류를 촉진하고 있다고 상상하고 싶어요.” 미국 뉴욕 스튜디오에서 작업하고 있는 아니카 이와 e메일로 대화를 나눴다.

아니카 이는 2021년 영국을 대표하는 현대미술관 테이트모던 터빈홀 전시 작가로 선정됐다. 공중부양하는 해파리 모양의 기계가 체온을 인식해 사람에게 다가가면서 콜레라와 페스트 등 런던의 한 시기를 연상시키는 미묘한 냄새를 내뿜는다. ‘냄새, 균, 기계’라는 아니카 이 예술의 핵심 요소를 모두 보여준 전시였다.

리움미술관도 ‘냄새, 균, 기계’가 가득 채운다. 한국계 미국인인 아니카 이가 한국에서 여는 첫 미술관 전시로 최근 10여 년 간 제작된 33점의 작품을 통해 아니카 이의 작품 세계의 출발과 발전과정, 지향점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전시를 본격적으로 관람하기에 앞서, 관람객은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코를 찌르는 쿰쿰하고 축축한 냄새에 침범당하게 된다.

아니카 이 ‘절단’(2024). 튀긴 꽃에 레진을 입혀 시간이 지날수록 부패하는 시큼한 냄새와 함께 색과 형태 등이 변한다. 리움미술관 제공
“냄새는 정치적···무시, 혐오와 연관”

“후각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즉각적인 감각 중 하나입니다. 냄새는 단순히 몸속으로 들어오는 게 아니라 분자 수준에서 지각에 침투해 변화를 일으키죠. 관객은 발효되는 듯한 이질적인 냄새를 맡으면서 시각을 넘어선 감각적 경험에 몰입하게 됩니다. 인간과 환경, 주체와 객체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하는 인식 상태가 되는 거죠.”

쿰쿰하고도 시큼한 냄새는 한마디로 묘사하기 어렵다. 시각으로도, 언어로도 포착되지 않는 감각이다. 아니카 이는 “냄새는 무척 정치적이다. 냄새는 무시당하거나 혐오스러운 것과 연관돼 과소평가된다”며 “본능적이면서도 통제할 수 없는 냄새가 신체와 교감하도록 강요함으로써 권력에 도전할 수 있는지 탐구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2살에 미국으로 이주한 아니카 이는 일찌감치 ‘냄새의 정치학’에 눈떴다. 그는 “미국 이민자 가정에서 자랐기에 냄새와 같은 감각적 경험이 어떻게 사람을 타자·이방인으로 분류할 수 있는지 잘 알게 됐다”며 “냄새는 정체성·소속감·배제와 깊이 연관돼 있으며 차이를 나타내는 강력한 표식”이라고 말했다. 아니카 이는 “권력에는 냄새가 없다”라고 말한다. 냄새나는 대통령실이나 CEO의 집무실을 상상하기 어렵다. 그는 자신의 작업이 “억압되고 소외된 감각적 경험을 되찾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아니카 이의 신작 ‘또 다른 너’(2024). 대장균에 해파리와 산호 등 해양생물에서 추출한 형광 단백질이 발현되도록 유전자를 조작해 시간이 지나면서 색과 모양이 변한다. 리움미술관 제공
감각의 정치학부터 ‘디지털 쌍둥이’ AI까지

3D 영상작품 ‘향미의 게놈지도’(2016)는 권력에 의한 위계와 착취를 벗어난 감각적 경험의 공유가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을 흥미로운 방식으로 담았다. 동식물의 혼종인 미지의 생명체 ‘사우다데리자’를 찾아 브라질 열대우림으로 떠난 화학자의 여정을 쫓는 이야기로, 사우다데리자는 박테리아를 방출해 인체에 생화학적 교란을 일으켜 타인의 감정과 감각을 자신이 느끼는 것처럼 경험하게 해 준다. 작가는 제국주의적 문화 전유, 환경 오염, 선주민 문명의 소실 등 이슈를 함께 다룬다.

이는 아니카 이가 이야기해온 ‘감각의 생물정치학(biopolitics of the senses)’에 대한 질문과 맞닿아있다. 그는 “권력과 통제가 어떻게 우리가 감각하고 반응하는 방식을 형성하는지 탐구하는 것”이라며 “우리 몸은 중립적 수용체가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역사적 힘에 의해 감각 사이에 위계를 만든다. 시각과 청각에 특권을 부여하고 후각과 촉각을 소외시키는 경우가 많으며, 위계는 성별과 인종에 따라 달라진다”고 설명했다.

신작 영상 ‘산호 가지는 달빛을 길어 올린다’(2024)는 AI를 자신의 공동 창작자인 ‘디지털 쌍둥이’로 내세운 작품이다. ‘공(公)’ 프로젝트의 첫 번째 작품으로 “작가의 사후에도 작업이 계속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에서 출발했다. ‘공 소프트웨어’가 아니카 이가 10여 년 간 만든 작품을 학습해 생성한 이미지는 세포, 식물, 산호, 문어와 같은 모습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데 전시에서 마주한 아니카 이의 작품들의 이미지가 혼합·변형되며 환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아니카 이는 AI와의 협업에 대해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의 지각이라는 렌즈를 통해 생각해 보는 것”이라며 “AI를 도구로 삼는 게 아니라 자율적인 개체로 협업해 인간도 아니고 기계도 아닌, 그 둘 사이의 틈새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초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제9행성’ 전시 전경.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제15회 광주비엔날레에 전시된 마르게리트 위모의 ‘*휘젖다’ 전시 전경. 연합뉴스
남서울미술관 ‘제9행성’, 광주비엔날레 등도 ‘비인간 존재와의 공존’ 다뤄

‘비인간 존재와의 공존’을 주제로 삼은 다른 전시도 연이어 열리고 있다.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은 ‘제9행성’(10월27일까지)이라는 제목의 전시를 열고 인간 중심적 관점을 벗어난 ‘행성적 사유’를 모색하는 작품들을 선보였다. 고창선은 ‘긴장하는 스피커’를 통해 관객이 접근하면 긴장된 몸짓을 보여주는 기계를 만들어 인간과 기계가 맺는 관계를 탐구하고, 황문정은 전시장 공간의 틈에 외계 생명체처럼 보이는 잡초의 뿌리 모양 조형물을 배치한 ‘지구에서 온 자들’을 선보인다.

박지수 학예연구사는 “각종 생태학적 위기와 재난 상황들은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비인간 존재에 주목하게 만들었다”며 “인간이 주인공이 아니며 서로 다른 이질적인 존재들이 위계 없이 평등하게 공존하는 행성을 상상하며 기획한 전시”라고 말했다.

올해로 30주년을 맞은 광주비엔날레(12월1일까지)는 전시 주제로 ‘판소리: 모두의 울림’을 내세우며 미생물·기계·자연 등 비인간 존재와의 관계와 공존을 다룬 작품을 대거 선보였다.


☞ 세련되고 매끈한 프랑스식 ‘판소리’···‘5·18정신’과 저항성은 묻혀
     https://www.khan.co.kr/culture/art-architecture/article/202409111719001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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