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요리사’ 속 팬트리 누가 채웠을까···“‘이븐한 재료’ 주어져야 공정한 대결 가능하죠”

최민지 기자 2024. 10. 2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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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 컴퍼니 ‘락앤쿡’ 최은주 대표가 21일 서울 강서구의 스튜디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리프트를 타고 ‘요리 지옥’으로 내려오는 1800모의 두부. 양문형 냉장고에서 튀어나와 베테랑 셰프들을 당황케 한 홍어와 들기름, 밀가루부터 캐비어까지 온갖 식재료가 끝없이 나오는 요술 상자 같은 팬트리.

전국에 ‘셰프 열풍’을 일으킨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는 화려한 식재료의 향연으로 시청자들의 눈과 입을 홀렸다.

“주방에서 셰프 위에 있는 건 단 하나, 재료”라는 최현석 셰프의 말처럼 식재료는 요리 프로그램의 꽃이다. 그렇다면 이 재료를 준비하는 것은 누구일까. 셰프들이 마음껏 기량을 펼친 데에는 ‘푸드팀’의 조력이 있었다. 화면에 비치는 달걀 한 알, 냄비 하나까지 이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흑백요리사> 푸드팀을 이끈 미디어 푸드 디렉터 최은주씨(42)를 지난 21일 서울 강서구의 락앤쿡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그가 대표로 있는 40평 규모의 스튜디오에는 세계 곳곳에서 사 모은 식기와 소품, 주방 가전, 각종 식재료가 천장까지 쌓여 있었다.

최 대표는 대중에게 낯선 자신의 일을 ‘미디어 푸드 디렉터’라는 말로 소개했다. “푸드 스타일리스트, 푸드 코디네이터 등 여러 단어가 있지만 저는 미디어 푸드 디렉터라는 용어를 쓰고 있어요. 재료 구매부터 뒷정리까지, 방송에 음식이 나올 때 필요한 모든 업무를 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미디어 푸드 디렉터가 하는 일은 프로그램마다 다양하다. 본격적인 ‘쿡방’(요리 방송)이 아니더라도 푸드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은 많다. 넷플릭스 예능 <데블스 플랜>에서 출연자들이 먹은 핑거푸드, 데이팅 프로그램 <솔로지옥> 속 ‘지옥도 데이트’ 특식도 최 대표의 손에서 탄생했다. 최 대표는 “방송의 기획 의도를 잘 파악해 메뉴를 선정하고 안전하고 예쁘게 음식을 선보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흑백요리사>에는 각종 식재료와 주방도구로 가득한 팬트리가 나온다. 이 안을 어떻게, 무엇으로 채울지는 푸드팀의 몫이다. 넷플릭스 제공

<흑백요리사>와 같은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경우 더 세심한 접근이 필요하다. 한식·양식·일식·중식 등 분야마다 주로 사용되는 도구, 식기는 물론이고 오일이나 가루 같은 재료도 천차만별이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게 준비했다간 공정성 시비가 불거질 수 있다.

“공부를 정말 많이 했어요. 밀가루를 하나 놓더라도 강력·중력·박력분을 전부 챙겨야 해요. 전분도 찹쌀·옥수수·감자, 오일은 엑스트라 퓨어 올리브유부터 카놀라유까지 종류를 다양하게 갖춰놓았죠. 어떤 요리를 하더라도 재료 때문에 방해받아서는 안되니까요.”

팬트리를 채운 뒤에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재료의 구매만큼 중요한 것이 보관”이기 때문이다. 실온 보관인 재료와 냉장·냉동 보관이 필수인 재료를 분류하고 적정 온도를 맞춰야 한다. 개중엔 빛이 닿으면 안 되는 재료도, 쉽게 상해 촬영 직전 구입해야 하는 재료도 있다. 재료를 구입·보관하는 데 이르면 다음은 스타일링이다. 팬트리가 화면에 담기는 만큼 어떻게 보이는냐도 중요하다. “과일, 채소 같은 신선 재료는 알록달록 예쁘게 배치했어요. 또 셰프님들이 팬트리에서 재료를 챙기다 보면 어느 한 부분이 텅 비는데 그럼 안 예쁘거든요. 빈 공간이 안 보이도록 신경 썼죠.”

<흑백요리사> 제 3라운드 팀별 미션에서는 각각 육고기와 해산물로 가득찬 ‘고기의 방’과 ‘해산물의 방’이 등장했다. 넷플릭스 제공
<흑백요리사> 2라운드 일대일 데스매치에서는 백수저와 흑수저 셰프가 홍어, 들기름 등 주어진 주재료로 요리 대결을 펼쳤다. 최 대표는 여러 미션 중 2라운드가 가장 어려웠다고 회상했다. 넷플릭스 제공

최 대표에게 가장 어려웠던 미션은 무엇일까. 그는 고민 없이 ‘2라운드 일대일 데스매치’를 꼽았다. 백수저와 흑수저 셰프가 하나의 주재료로 요리해 맞붙은 미션이다. 일렬로 늘어선 양문형 냉장고 20대에서 다양한 주재료가 등장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화제가 됐다.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재료가 ‘빡!’ 임팩트 있게 보여야 하니까 스타일링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시래기를 걸어둘 것이냐 눕혀둘 것이냐’, ‘고기에는 갈고리를 사용할 것이냐 말 것이냐’ 논의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죠.”

무엇보다 두 명의 셰프가 동일한 양과 상태의 재료를 받는 것이 중요했다. “‘이븐한 환경’이 제공”돼야 공정한 대결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2라운드 주재료 중 하나였던 홍어는 구하는 데 특히 애를 먹었다. “크기와 삭힌 정도가 비슷한 홍어를 드리는 게 어려웠어요. 흑산도에서 홍어를 배에 태워 육지로 보내고, 거기에서 또 서울까지 가져와야 했죠. 그때가 설 연휴라 배가 뜨니 마니 말이 많았거든요. 애태우며 홍어를 기다린 기억이 나요.”

최 대표의 방송 경력은 2009년 MBC <찾아라! 맛있는 TV>(2001~2016)에 스태프로 참여하면서 시작됐다. 어려서부터 삼겹살 하나를 먹어도 가지런히 세팅해놓고 구웠던 그는 대학에서 식공간연출을 전공했다. 2012년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들었고 얼마 안 가 쿡방이 전성기를 맞았다. 쿡방의 대명사인 JTBC <냉장고를 부탁해>(2014~2019)는 최 대표가 가장 긴 시간 참여한 요리 프로그램이다. 지금의 그를 있게 한 노하우와 지식 역시 이때 얻었다. 무려 셰프 100명이 참여한 최대 규모 요리 프로그램을 거뜬히 해낸 것도 이 경험 덕분이다. 한 방송의 푸드팀은 적게는 1~2명, 많게는 3~4명으로 구성되지만 <흑백요리사>는 최 대표를 포함해 25명의 인력이 투입됐다.

<흑백요리사>는 한 명의 요리인인 최 대표에게도 커다란 영감과 자극을 줬다. 그는 <흑백요리사>가 “다시 깨어나는 시간”이었다고 했다. “내내 울컥울컥하면서 지켜봤어요. 한국에 이렇게 다양한 기술과 음식을 선보이는 셰프들이 있다는 데 감탄했죠. 제가 언제 또 이분들의 요리를 옆에서 지켜볼 수 있겠어요. 정말 많이 배웠고, 처음 일 시작했을 때가 떠오르기도 했고요. 무엇보다 초심으로 돌아가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흑백요리사> 흥행은 침체에 빠졌던 국내 요식업과 요리 프로그램의 부활로도 이어지고 있다. JTBC는 <냉장고를 부탁해> 새 시즌의 연내 방송을 목표로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파인 다이닝을 비롯한 미식 경험을 향한 관심도 높다.

“<흑백요리사>는 시청자들에게 색다른 경험을 준 것 같아요. 보기에도 좋고 맛도 좋은, 감동을 주는 요리들이 등장했죠. 이를 계기로 다시 한번 쿡방이 주목받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그간 자기 길을 묵묵히 걸어온 분들이 빛을 발할 수 있게 되면 좋겠습니다.”

넷플릭스 <흑백요리사>의 ‘푸드팀’을 이끈 미디어 푸드 디렉터 최은주씨가 지난 21일 서울 강서구 스튜디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창길기자
최은주씨는 인터뷰 전 우엉차와 초콜릿, 쿠키 같은 다과부터 챙겼다. 김창길기자

최민지 기자 m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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