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카’ 아저씨 스토커 잡고보니…‘간첩몰이’ 국정원 직원이었다

이지혜 기자 2024. 10. 23.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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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보원의 민간인 사찰 국가배상청구 기자회견이 열린 23일 오전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대회의실에서 피해 당사자인 김수형 대학생진보연합 회원(오른쪽 둘째)이 발언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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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 비판 집회를 여는 시민단체인 촛불승리전환행동(촛불행동)의 회원이자 라면 가게 직원인 주지은(45)씨는 지난 3월22일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모꼬지를 떠나는 한국대학생진보연합(대진연) 후배들을 위한 도시락을 준비하던 중 자신을 몰래 촬영하던 40대 남성 ‘스토커’를 발견하며 일상은 삽시간에 공포로 변했다. 남편과 함께 붙잡은 스토커의 휴대전화에서 주씨와 주씨의 가족, 촛불행동과 대진연 소속 지인의 행적을 좇아 기록한 사진과 카카오톡 메시지가 무더기로 발견됐다.

‘그 남자’는 주씨가 산책 중 멈춰서 휴대전화를 보는 모습을 찍어 “지령 수수 중”이라고 보고하고, 주씨의 초등학생 딸 등하굣길까지 미행했다. 주씨가 규칙적으로 운동하는 모습은 “간첩 활동을 위해 자기관리에 몰두하는 모습”으로 보고됐다. 근처 지구대에 스토킹 신고를 하고 경찰 수사가 진행되면서 문제의 스토커가 ‘국가정보원 직원 이아무개’씨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주씨를 비롯해 대진연 회원들, 김민웅 촛불행동 대표 등 사찰 피해자들은 지난 4월 국정원 직원 이씨 등을 국가정보원법 위반 혐의 등으로 경찰에 고발했다.

하지만 최근 경찰은 이씨가 주씨 등을 사찰한 사실을 다 인정하고도 ‘불송치’ 결정을 내렸다. ‘국정원 내부 심사와 승인’을 거친 미행이라 절차적 하자가 없다는 이유였다. 경찰은 “국정원이 주씨 등에 대해 정보수집활동을 했던 합리적 근거가 확인됐다”고 밝혔지만 구체적인 근거를 공개하진 않았다. 국정원이 지난 3월 “북한 문화교류국과 연계 혐의가 의심되는 인물에 대해 안보침해범죄행위를 추적해왔다”고 밝힌 것과 같은 결론이었다.

결국 주씨는 국정원 민간인 사찰의 위법 여부를 법원에 묻기로 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참여연대 등이 참여하는 국정원감시네트워크는 23일 서울 서초구 민변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주씨 등 12명의 사찰 피해자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국정원이 지난 총선을 앞두고 북한과 연계돼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의심만으로 정부 비판 집회에 자주 참석하는 원고들에 대한 사찰을 대대적으로 진행했다”며 “국정원의 민간인 사찰이 정상적 안보조사활동인지 소송을 통해 정식으로 가려보고자 한다”고 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나온 주씨는 “사찰 이후 저는 길을 가다가도 뒤를 돌아보거나 제 쪽으로 휴대폰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으면 유심히 살피게 되고 혹시 나를 찍는 건 아닌지 의심을 한다”며 “국가 폭력에 의해 선량한 시민의 일상이 파괴되는 경우는 없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보안법 위반 관련 정보수집 활동은 법이 규정한 국정원의 업무 범위다. 그러나 북한과 연계돼있다는 자의적인 의심만으로 국정원은 얼마든지 민간인을 사찰할 수 있다. 원고 대리인 백민 변호사는 이날 “촛불집회와 같은 단순 집회 참가자들에 대해서 북한과 연계되어 있다고 몰아간 것은 빙산의 일각으로 지금도 그러고 있을 수 있다”며 “피해자들이 북한과 어떤 연계 혐의가 있다는 것인지 국정원이 소송을 통해 밝혀주길 바란다”고 했다.

국정원감시네트워크는 이번 국정원의 민간인 사찰이 개정 국정원법의 취지를 무너트린 행위라고 보고 있다. 올해 1월1일부터 시행된 개정 국정원법은 대공수사권을 경찰로 이관하는 내용이다. 이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국정원이 선거에 노골적으로 개입하고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을 조작한 사실 등이 밝혀지면서 추진된 ‘국정원 개혁’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 들어 이를 되돌리려는 ‘반동’이 시작됐다. 국정원의 대공수사권 이관을 6개월 앞둔 지난해 7월 ‘안보범죄등 대응업무규정’ 시행령을 제정해 국정원이 경찰의 대공수사에 개입할 여지를 마련했다. 업무협력을 명분으로 국정원이 업무협의회를 설치해 수사기관과 정보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다. ’꼼수 시행령’으로 법률이 위임한 업무권한을 위반하고 국정원 개혁을 되돌리려 한다는 비판이 나왔지만 국민의힘은 지난 8월부터 ‘국정원 대공수사권 부활’을 당론으로 추진하고 있다.

장동엽 참여연대 선임간사는 “대공수사권을 경찰에 넘기고 조사권만 가진 국정원이 사실상 수사와 조사의 경계, 불법과 합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민간인 사찰을 자행하고 있다”며 “국정원 내부에서 (정보 수집의 적정성을) 심사했다는 이유만으로 불법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이지혜 기자 god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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