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명장' 윤흥신 장군의 충성심 기려야

김석이 시민기자 2024. 10. 23.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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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물길 입구 부산 다대포 방어에 앞장
병력 열세 극복 못하고 왜군과 싸우다 순국
초량 동상, 동래 충렬사, 사하 윤공단 참배를

윤흥신 장군을 아시나요

부산 동구 초량동에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지키려다 순국한 다대첨사 윤흥신 장군상이 우뚝 서 있다.


부산 동구 초량동 고관 입구 교차로에 눈에 띄는 동상이 있다. 활을 든 황금색 동상으로 임진왜란 때 순절한 다대첨사 윤흥신(尹興信) 장군상이다. 부산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부지에서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 전투에 사용된 유물이 다량 출토 되었고, 원형에 가까운 찰갑이 발굴됐다. 찰갑이란 몸 전체를 방어하기 위하여 비늘 모양으로 꿰어 만든 기승용 갑옷을 말한다. 윤흥신 장군상은 실제 발굴된 유물을 근거로 갑옷을 찰갑으로 표현했다. 본래 이 자리에 윤흥신 장군을 기리기 위한 석상이 있었는데, 대리석이 깨어지고 이끼로 인한 관리가 어려워졌다. 파평 윤씨 종친회에서는 석상을 사하구 다대동 윤공단으로 옮겨야 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석상을 옮기는 것이 쉽지 않았다. 논란 끝에 2020년 대리석상은 철거되고 지금의 자리에 윤흥신 장군상이 지난 1월 26일 건립됐다.

부산 동래구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에 조선시대 비늘갑옷이 전시되어 있다.


다대첨사 윤흥신 장군은 선조 25년(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이 14일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뒤 다대진을 공략하자 동생 윤흥제와 함께, 군인과 군민을 이끌고 일본군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다대포는 경상좌수영 수군 진성이 있던 곳으로 낙동강으로 향하는 물길을 통제할 수 있는 전략 요충이었다. 왜군은 내륙 진·출입에 긴요한 낙동강 수로를 확보해야 하기에 다대포진성을 반드시 점령해야 했다. 수백 척에 이르는 왜선을 본 부하장수가 “성을 나가 피하는 것이 낫겠습니다”라고 했지만 윤 첨사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 어찌 간다는 것이냐”고 호통쳤다. 윤 첨사는 수백에 불과한 병사를 거느리고 온종일 전투를 벌여 성을 지켜냈다. 이튿날 새벽부터 재개된 전투에서 방어선이 뚫리자 윤 첨사와 병사들은 퇴각하는 것처럼 위장해 왜군을 성안으로 유인한 뒤 기습했지만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했다. 윤 첨사는 선조 때 선무원종공신의 일등공신이 됐다. 하지만 동래 충렬사 제사에서 윤 첨사의 위패는 빠졌다. 임진왜란 이후 180 여년이 지난 영조 48년(1766년) 동래부사와 경상감사 등을 지낸 조엄이 자료를 찾아 조정에 포상을 청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부산 사하구 다대동 윤공단 비석 전경.


다대동(사하구 윤공단로 112)에 있는 윤공단은 다대진성 안에 있던 단을 1970년 12월 5일에 바다가 보이는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다대동 윤공단은 석제단과 비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석 양쪽에는 함께 순국한 동생 윤흥제비와 왜군에 대항하다 순국한 주민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순난사민비(殉難士民碑)가 있다.

부산 동래구 안락동 충렬사 전경.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 싸우다 순절한 부산지역 호국선열의 영령을 모신 사당으로 충렬사(忠烈祠)가 있다. 충렬사는 동래구 안락동에 있는 송상현을 모신 사당(서원)이다. 선조 38년(1605년) 동래부사 윤훤(尹暄)이 읍성의 남문 안에다 충렬공 송상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송공사단(宋公祠壇)을 세운 것이 시초다. 인조 2년(1624년), 선위사(宣慰使) 이민구(李敏求)의 소청으로 임금이 충렬사라는 사액을 내림과 동시에 부산진성 싸움에서 전사한 부산진첨절제사 정발이 배향(配享)됐다. 효종 3년(1652년) 동래부사 윤문거(尹文擧)가 충렬사 사우의 위치가 적합지 않다하여 현재의 자리인 래산(萊山) 아래 안락리로 옮겨 지으면서 규모를 확장하여 서원의 예를 따를 것으로 하여 안락서원(安樂書院)으로 불렀다.

숙종 35년(1709년) 동래부사 권이진(權以鎭)이 성내에 있던 충렬사 옛터에 별사(別祠)를 세우고 임란 당시 양산군수 조영규(趙英圭) 동래교수 노개방(盧蓋邦)을 병향(竝享)하고, 유생 문덕겸(文德謙)을 이에 배향하였으며, 별사 옆에 별채를 지어 비장(裨將) 송봉수(宋鳳壽) 김희수(金希壽), 겸인 신여로(申汝櫓), 향리 송백(宋伯), 부민 김상(金祥)등 9인의 의사를 추향(追享) 할 것과 별사의 사액을 조정에 탄원했다. 숙종 37년(1711년) 충렬사 별사에 사액이 내리고, 9인의 의사를 추향했다.

영조 48년(1766년) 행부사직 조엄이 다대첨사 윤흥신의 공적이 징비록을 비롯한 곳곳에 있음에도 동래의 충렬사에 향사되지 않은 것은 부당하다는 사실을 임금에게 호소했다. 이에 충렬사 사당의 정당에는 부사 송상현과 첨사 정발과 병향되고, 노계방 윤흥신 조영규가 각각 배향됐다. 1972년 6월 26일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됐다. 총 93신위를 모시고 있으며 매년 5월 25일 순국선열들을 추모하기 위해 제향을 봉행한다. 호국선열의 충성심 앞에 두 손을 모으며 그 넋을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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