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이동녕

김재근 선임기자 2024. 10. 2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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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재덕이 출중하나,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를 도와서 선두에 내세우고, 스스로는 남의 부족을 보충하고 고쳐 인도하는 일이 일생의 미덕이었다. 선생의 애호를 받은 사람은 오직 나 한 사람이었다."

백범 김구가 석오 이동녕을 회고한 글이다.

충남 천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석오 이동녕의 서훈을 상향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석오에 대한 많은 자료가 나왔고, 연구 결과도 축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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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근 선임기자

"선생은 재덕이 출중하나,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를 도와서 선두에 내세우고, 스스로는 남의 부족을 보충하고 고쳐 인도하는 일이 일생의 미덕이었다. 선생의 애호를 받은 사람은 오직 나 한 사람이었다."

백범 김구가 석오 이동녕을 회고한 글이다. 일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석오는 광복을 5년 앞두고 1940년 3월 급성폐렴으로 쓰촨성 치장에서 71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석오는 백범이 늘 의지하고, 믿고, 대소사를 상의했던 큰 인물이었다.

석오는 임시정부의 기둥이었다. 입법부인 임시의정원의 초대 의장을 지냈고, 국무총리를 2차례 역임했다.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도입한 국무령도 2회 지냈고, 주석을 5차례나 역임하는 등 가장 많이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일했다.

석오가 임정의 수반을 오래 수행한 것은 헌신과 소통, 친화력 때문이었다. 임정과 독립운동 세력 내에서 갈등과 분열의 위기가 있을 때마다 석오는 극단을 배격화고 대동단결을 호소하며 사태를 수습했다.

충남 천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석오 이동녕의 서훈을 상향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석오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됐다. 훈격이 더 높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받지 못한 것이다. 석오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다수의 인물은 물론 독립운동을 도와준 대만의 쑹메이링, 천궈푸, 천치메이까지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석오는 을사조약 무효를 주장했다가 감옥생활을 했고, 북간도로 망명하여, 서전의숙을 세워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국내에 들어와 신민회와 공립협회 설립, 대한매일신보 발행 등에 앞장섰다. 간도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초대 교장을 맡았으며, 블라디보스톡에서 한국군관학교를 설립하려다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석오는 평생을 이역에서 풍찬노숙하며 조국독립에 삶을 바친 인물이다. 백범과 함게 임시정부의 양대 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석오에 대한 많은 자료가 나왔고, 연구 결과도 축적됐다. 과거 석오에게 대통령장을 추서한 것은 매우 서툰 처사였다. 훈격을 홀대하는 것은 그의 숭고한 독립운동을 폄하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제라도 석오의 영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바치는 게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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