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칙고용·노동법 무시하는 사업주들…임금체불액 1조 넘었다

박태우 기자 2024. 10. 23.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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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체불액 올 상반기 1조436억원 기록
올 상반기 임금체불액이 1조436억원을 기록하며, 올 연말까지 임금체불액이 2조원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나미영(가명)씨는 경기도의 한 편의점에서 점장으로 일했다. 나씨와 근로계약을 체결한 ㄱ사는 지에스(GS)25·씨유(CU) 등 편의점 가맹본부와 가맹계약을 체결하고, 편의점 수십곳을 운영한다. 나씨는 지난 5월까지 3년 동안 ㄱ사의 편의점을 옮겨 다니며 점장으로 일했지만, 연차휴가수당·초과근로수당 등을 못 받았다. 나씨와 동료들이 못 받은 각종 수당만 2600만여원에 이른다. ㄱ사는 나씨에게 ‘편의점마다 일하는 노동자들이 5인이 안 된다’는 이유로 수당을 지급하지 않았지만, ㄱ사의 취업규칙을 적용받는 편의점 점장만 40명이 넘는다. 이 경우 ㄱ사가 하나의 사업장에 해당해 5인 이상 사업장이라는 것이 나씨의 주장이다. 나씨는 최근 한겨레에 “점장들과는 근로계약을 맺고 4대 보험도 가입해줬지만, 아르바이트 노동자들과는 근로계약이 아니라 3.3%(사업소득 신고) 계약을 맺었다”며 “기업형으로 편의점을 운영하면서 임금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고 했다. 나씨는 5월 고용노동부 부천지청에 임금체불 진정을 내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올해 상반기까지 임금체불액이 1조436억원을 기록하며 올해 임금체불이 사상 최대치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단순히 사업주의 지불능력 부족뿐 아니라, 변칙적인 고용과 노동법 미준수가 임금체불을 늘리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임금체불은 임금을 ‘늦게 줘서’도 발생하지만, ‘마땅히 지급할 돈을 안 줘서’ 발생하기도 한다. 노동자들의 노동법 지식과 권리의식은 높아졌지만, 사업주들의 준법의식이 이에 못 미치면서 체불이 확산되는 모양새다.

나씨가 ‘사업장 쪼개기’를 당했다면, 김선경(가명)씨는 ‘근로일 쪼개기’를 당했다. 김씨는 지난해 7월부터 지난 8월 말까지 서울의 ㄴ재단법인에서 주 5일 하루 5~7시간씩 근무했다. 그러나 근로계약은 월~화요일은 ㄴ재단과, 수~금요일은 ㄴ재단과 같은 건물에 있는 ㄷ사단법인과 맺었다. ㄷ법인이 ㄴ재단에 지급해야 할 비용 대신 김씨의 인건비를 지급한 것이지만, ㄷ법인에선 아무런 업무지시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ㄴ재단은 근로계약상 근로시간이 주 15시간이 안 된다는 이유로 김씨에게 주휴·연차휴가수당을 지급하지 않았다. 일한 지 1년이 지나 퇴사를 결심하고서야 미지급 사실을 알게된 김씨는 ㄴ재단에 지급을 요청했다. 하지만 ㄴ재단은 ㄷ법인에 사직서를 내야 지급할 수 있다고 버텼다. 김씨는 노무사의 도움을 받아 ㄴ재단에 항의하고서야 밀린 임금을 받을 수 있었다. 김씨는 “(노동법을) 잘 몰랐다면 임금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며 “경험이 부족할수록 억울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21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박해철 의원(더불어민주당)이 고용노동부에서 제출받은 2019년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임금 항목별 체불 현황을 보면, 연차휴가수당 등과 같은 ‘기타금품’ 체불이 급증했다. ‘기타금품’은 기본급·초과근로수당 등 ‘임금’과 ‘퇴직금’을 제외한 나머지 체불임금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2019년과 2023년을 비교했을 때 ‘임금’ 체불액은 9352억원에서 9746억원으로 4.2% 증가하고, 퇴직금 체불은 6910억원에서 6838억원으로 1% 남짓 감소했다. 반면 기타금품 체불은 955억원에서 1261억원으로 32%나 증가했다. 같은 기간 전체 체불액이 1조7217억원에서 1조7845억원으로 늘었는데, 체불액 증가액의 절반이 기타금품이었던 셈이다. 기타금품 체불이 전체 임금 체불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2019년 5.5%에서 지난해 7.1%로 증가했다. 올해 상반기 역시 기타금품 체불액은 785억원으로, 지난해의 절반 수준을 이미 넘겼다.

기타금품 등 체불임금의 증가는 사업주의 의무에 대한 ‘무시’나 ‘무지’에서 발생한다는 분석이다. 수도권의 한 근로감독관은 “기타금품 체불은 연차휴가수당과 연말정산 환급금이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일부 사업주들은 이런 금품들을 ‘일을 안 했는데 받는 돈’처럼 인식해 지급하지 않으려 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김기홍 노무사(노무법인 돌꽃)도 “초과근로수당 등을 지급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노동자들이 달라고 하면 일단 버티다가, 진정이 들어오면 그제서야 지급하는 사업주들도 꽤 된다”며 “사업주의 낮은 준법의식이 체불을 키우는 것”이라고 짚었다.

지난달 11일 노동부의 수사 끝에 구속된 임금체불 전과 17범의 인테리어업자가 대표적 사례다. 해당 사업주는 온라인플랫폼을 통해 아파트 리모델링 등 일감을 구한 뒤, 해당 지역 인력소개업체를 통해 일면식도 없는 일용직 노동자를 고용한 뒤 노동자들에게 임금 3700여만원을 지급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2016년부터 구속되기까지 신고된 체불 사건만 343건이었다. 노동부 경기지청 관계자는 “조사에 불응해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체포했는데, 조사받으러 와 현장에서 800만원을 청산하더라”며 “노동자는 쓰다버리면 그만, 임금은 안줘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노무관리가 취약한 영세사업장의 경우 사정이 더 심각하다. 노동자들은 노동법을 아는데, 사업주들은 모르는 사례들이 많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액수와 비중 면에서 증가하고 있는 5인 미만 사업장의 체불도 비슷한 맥락일 수 있다. 비수도권의 한 근로감독관은 “영세사업장의 경우 근로계약서·임금명세서 교부 의무를 아직도 모르는 사업주들이 많다”며 “근로시간 관리를 비롯한 노무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체불액 확정에도 어려움이 많다”고 했다.

임금체불 사전 예방을 위해 사업주들이 노동법을 준수할 수 있도록 사전적 근로감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해철 의원은 “임금체불 제재와 처벌 강화뿐만 아니라, 예방대책도 필수적”이라며 “일상적인 노동법 미준수가 노동자들에게 임금체불이라는 고통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노동부가 사업주에 대한 근로감독·지도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박태우 전종휘 기자 eh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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