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몰아낸 독립협회 ‘자립투쟁’…일본, 만세를 부르다

길윤형 기자 2024. 10. 22.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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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윤형의 조선의 갈림길 _17
시페이예르는 독립협회의 반러 운동을 일종의 ‘배은망덕’이라 받아들였다. 극도로 분노한 상태에서 3월4일 가토를 찾아가 “한국은 도저히 독립할 수 없다. 러·일 양국이 분할해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두 나라는 결국 4월26일 갈등을 다시 어정쩡하게 봉합하는 로젠-니시 의정서를 체결했다. 이로써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을 통해 만들어졌던 한반도 내 ‘러시아 우위’ 구도가 무너지게 된다.
구한말 당대 조선을 대표하는 최고의 엘리트라 할 수 있었던 좌옹 윤치호(1865~1945)는 식민지 시기까지 이어지는 길고 긴 굴곡진 삶을 살며 긴 일기(1883~1945)를 남겼다. 특히 1889년 12월부터 1943년까지 영어로 작성한 일기는 이 고된 시대를 살아내야 했던 고달픈 지식인의 내면 풍경이 잘 담겨 있다. 특히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은 독립협회를 주도하던 시기인 1897~1898년의 일기다. 러시아의 세력을 몰아낸 윤치호는 1898년 3월19일치 일기에 “조선은 황금 같은 기회를 얻었다”(Corea has now a golden oppoturiny)고 적었다. 읽으면 눈물이 난다. 한겨레 자료사진

1897년 하반기 들어 러-일 알력이 본격화되자 서재필(1864~1951)·윤치호(1865~1945) 등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조선의 ‘마지막’ 개혁파들은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들이 볼 때 조선의 상황이 악화하게 된 가장 큰 책임은 러시아의 ‘무책임한 태도’에 있었다.

고종은 1896년 2월 아관파천을 통해 나라의 운명을 걸었지만, 러시아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할 뿐이었다. 이 무렵 러시아가 전략적 관심을 기울인 지역은 한반도가 아닌 만주였다. 그랬기에 대한반도 정책의 제1원칙은 ‘적극 원조’가 아닌 ‘일본과 충돌 방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가토 마스오 공사 시절 을미사변·아관파천으로 절대적인 열세에 몰린 세력을 극적으로 회복하는 데 성공한다. 1894년 10월 부산영사관에서 조선 근무를 시작한 가토는 1897년 2월부터 공사로 임명돼 1899년 6월까지 근무했다. 이 시기 일본은 경인철도·경부철도 부설권을 획득했다. 고종은 가토를 절대적으로 신뢰해 러시아와 맺은 비밀 밀약 문서까지 보여준다. 가토는 1897년 11월13일 니시 도쿠지로 외무대신에게 전하는 전문에서 “절대 다른 사람에게 누설하지 않겠다는 약정서를 써서 본 후 이를 베꼈다”며 문서의 전문을 송부했다. 일본 외무성 제공

대한제국과 러시아의 엇갈린 이해관계로 인해 수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가장 심각한 폐해는 김홍륙(?~1898) 같은 ‘통역 권력’의 국정 농단이었다. 가토 마스오 일본 공사는 1897년 1월6일치 전문에서 “김홍륙은 국왕이 (카를 베베르) 러시아 공사의 의견이라면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을 이용해 자기 의사를 유리하게 관철시키기 위해 베베르의 뜻을 고친 예가 적지 않다”고 적었다. 윤치호는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주워들은 러시아어 몇마디뿐인 악마 같은 인간”(7월14일치 영문일기)인 김홍륙을 억제하지 않는 베베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9월19일치 일기엔 갑오개혁을 주도했던 “이노우에(가오루 전 일본 공사)는 지나치게 많이 간섭해, 베베르는 지나치게 적게 간섭해 실패했다”고 한탄했다.

이런 갑갑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조선의 개화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직접 거리에 나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밖에는 없었다. 옛 갑신정변(1884)의 주역이었던 서재필이 필립 제이슨이란 이름의 미국인이 되어 돌아온 것은 갑오개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895년 12월이었다. 그는 1896년 4월 최초의 순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했고, 이어 청에 대한 사대를 상징하는 영은문을 부수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짓자는 운동을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그해 7월2일 독립협회가 설립됐다.

서재필은 1895년 12월 조선에 돌아와 이듬해인 1896년 4월8일 우리나라 최초의 순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이어, 청에 대한 사대를 상징하는 영은문을 부수고 그 자리에 독립문·독립공원·독립관을 설치하자는 운동을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7월2일 독립협회가 만들어졌다. 처음 태어난 독립협회는 왕실의 이익을 대변하는 관변단체의 성격이 강했다. 윤치호는 잡지 ‘신민’ 1926년 6월호에 이 무렵 독립협회는 “유약한 토론이나 위기지희(圍碁之戱·바둑)로 시간을 보내”던 관료들의 사교클럽이었다고 적었다. 국가유산청 제공

처음 만들어진 독립협회는 관료들의 유약한 사교클럽에 불과했다. 이 모임이 “독립 자주의 정신으로 국정을 개선하자는 주장”을 쏟아내는 정치단체로 탈바꿈한 것은 윤치호가 본격 활동에 나서면서였다. 그는 1897년 8월5일 서재필에게 현재 “독립협회가 하는 일은 아무 효과가 없다”면서 이 조직을 “강의실·도서관·박물관을 구비한 일반 지식협회로 조직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사흘 뒤인 8일엔 “독립협회를 유익한 기관으로 전환하자”고 제안해 동의를 얻어냈다.

머잖아 한쪽의 일방적인 ‘짝사랑’으로 유지돼 온 한-러 관계의 모순이 폭발하게 된다. 결정적인 계기는 1885년 9월 부임 이후 조선과 고종을 동정해 온 베베르의 이임이었다. 그가 9월15일 떠나자 도쿄에서 주일 대리공사직을 수행하고 있던 알렉세이 시페이예르가 다시 조선으로 복귀했다. 이 깐깐하고 에누리 없는 시페이예르의 등장으로 인해 양국 관계는 거센 파열음을 내기 시작한다.

부임 직후 시페이예르는 조선의 재정고문을 아일랜드계 영국인인 존 브라운(1842~1926)에서 러시아인 키르 알렉세예프로 교체하려 했다. 사실 이는 1896년 5~8월 러시아를 방문했던 민영환 대표단의 핵심 요구 사항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브라운은 조선의 국가 재정을 아껴 갑오개혁 때인 1895년 3월 일본에 진 빚 300만엔 가운데 일부를 상환한 유능한 인물이었다. 민종묵 외부대신과 박정양 탁지부대신이 사표를 내는 진통 속에서 11월5일 브라운을 밀어내고 알렉세예프를 새 재정고문으로 초빙하는 새 계약이 체결됐다.

이 일이 결정적인 계기가 돼 조선인들의 누적된 반러 감정이 불을 뿜게 된다. 이미 러시아인 군사고문인 드미트리 푸차타 대령이 조선군을 양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재정까지 같은 나라의 관리를 받게 되면 ‘조선의 독립’이 위태로워질 것이라 우려한 것이었다. 고종의 생각도 이 무렵엔 비슷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는 12월3일 자신을 찾아온 가토에게 “러시아는 점차 위력을 뻗쳐 그들의 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하다”, “모든 임무에 간섭하지 않는 게 없다”면서 다시 은근슬쩍 일본에 의지하려는 뜻을 내보였다.

그 직후 만주에서 아슬아슬하게 유지돼온 러-일 간 균형을 깨는 ’대사건’이 발생한다. 독일이 11월 산둥 반도 자오저우만을 점령했다는 사실에 자극받은 러시아가 12월15일 뤼순, 20일 다롄을 점령하고, 이듬해 3월27일 청을 압박해 랴오둥 반도 조차에 관한 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불과 2년 반 전에 랴오둥 반도를 획득했다가 러시아 등 ‘3국 간섭’에 굴복해 이를 반환했던 일본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된다.

먼저 움직인 쪽은 독립협회였다. 윤치호는 해를 넘긴 1898년 2월7일 서재필에게 “독립협회를 설득해 몇가지 정략을 전하께 건의하자”고 제안했다. 엿새 뒤인 13일 열린 독립협회 토론회의 주제는 대한제국이 러시아의 노예가 될 위험에 처했다는 것이었다. 토론회장에선 이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나라는 지금 시베리아 철도를 놓고 있으며, 우리가 그 나라의 노예가 되면 그 철도에서 강제노역을 하게 될 것이다.” 윤치호는 같은 날 “독립협회 명의로 상소문을 쓰자”고 제안해 50대 4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안경수 독립협회장의 이름으로 제출된 상소문은 ‘조선왕조실록’ 2월21일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이 강조한 것은 ‘조선의 자립’이었다. “자립은 재정을 남에게 양보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남에게 양보했고, 병권(兵權)은 스스로 잡고 있어야 하는데 남이 잡고 있습니다. (중략) 간사한 무리들(김홍륙 등)이 기회를 틈타 중간에서 사욕을 부리거나 외국의 힘을 빌려 지존을 위협하거나 혹은 풍설로 속여 성총(聖聰)을 현혹시켜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시페이예르는 독립협회의 반러 운동을 일종의 ‘배은망덕’이라 받아들였다. 극도로 분노한 상태에서 3월4일 가토를 찾아가 “한국은 도저히 독립할 수 없다. 러·일 양국이 분할해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사흘 뒤인 7일엔 대한제국 외부에게 “귀국 정부가 먼저 요청해 군사고문과 재정고문을 파견”했다고 밝히며 러시아의 도움을 계속 받을 뜻이 있는지 24시간 안에 답하라고 추궁했다. 대한제국은 ‘사흘의 여유를 달라’고 요청했다.

‘독립신문’은 1898년 3월12일치 3면 중단에 이틀 전에 열렸던 만민공동회의 결정 사항을 자세하게 적었다. “대한 인민이 군부와 탁지(재정)의 권리를 외국에 맡기는 것은 원하는 바가 아니라. 이 기회를 타서 대한 정부에서 (러시아) 사관들과 고문관을 해고케 하고, 대한 정부에서 (직접) 인민의 원(뜻)을 좆아 병권과 재정을 자유로 하게 하여 달라는 답장을 외부 대신께 전하라고 총대 위원 셋을 내어 편지를 외부 대신에게로 (전)하였는데….” 이렇게 뽑힌 총대 위원 가운데 훗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는 이승만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무렵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7월8일 열린 졸업식에선 ‘한국의 독립’이라는 제목의 영어 연설을 할만큼 실력을 키우고 있었다.

답변 시한이 다가오던 10일 오후 2시 서울 종로에서 무려 8천명의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만민공동회가 열렸다. 12일치 독립신문 3면을 보면, 이날 모인 이들은 이승만(1875~1965)·장봉·현공렴 등 3명을 대표로 뽑아 외부대신에게 “군부와 탁지(재정) 권리를 외국에 맡기는 것은 (대한 인민이) 원하는 바가 아니다”, “(러시아) 사관들과 고문관들을 해고하고 대한 정부에서 인민의 원(뜻)을 좇아 병권과 재정을 자유로 하게 해 달라”는 요구서를 전달하게 했다.

이튿날인 11일 열린 의정부 회의에서 놀라운 결과가 도출됐다. 대한제국 외부는 12일 오전 6시 러시아 공사관에게 “이제부터 병제와 재무에 관해 전적으로 우리나라 사람이 관장하겠다”고 답했다. 이 회신을 접수한 러시아는 “스스로 자신을 완전히 보전하게 된 것을 축하한다”고 싸늘하게 답한 뒤 대한제국에 파견했던 군사·재정고문을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이 과정을 소리 없이 지켜보던 가토는 3월31일 니시 도쿠지로 외무대신에게 보낸 전문에서 “감정이 극단으로 치달아 때때로 무모한 폭거를 기도하는 한인들이 매우 침착하고 노련한 태도를 지켜 무사하게 이 국면을 매듭지었다는 것”에 대해 “본관은 내심 기뻐하는 바”(本官モ竊ニ欣喜スル所ニ有之候)라는 평을 남겼다.

대한제국에서 러시아의 군사·재정고문을 몰아낸 독립협회의 활동은 자립을 지향하는 매우 뜻깊은 움직임이었다. 다만, 일본은 이를 러시아에 뒤쳐졌던 자국의 세력 마련을 위한 호기로 활용했다. 가토 마스오 일본 공사는 3월31일 니시 도쿠지로 외무대신에게 보낸 기밀 전문에서 “감정이 극단으로 치달아 때때로 무모한 폭거를 기도하는 많은 전례를 가진 한인들이 이번에 한하여 매우 침착하고 노련한 태도를 지키며 한 걸음을 잘못 걸으면 의외의 난제를 빚어낼 시기에 처하여 무사하게 이 국면을 매듭지었다는 것은 본관도 내심 기뻐하는 바”라고 적었다. 아시아역사자료센터 제공

러시아의 뤼순 조차로 분노했던 일본은 이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니시는 19일 로만 로젠 주일 러시아 공사에게 “국토의 접근성 및 현재의 이익”을 고려할 때 대한제국에 “조언·조력을 제공하는 의무를 일본에 위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대가로 제시한 것은 “만주와 그 연안을 일본의 이익 밖에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조선은 우리가 차지할 테니 만주는 알아서 하라는 이른바 ‘만한교환론’을 제안한 것이었다.

러시아는 이번에도 결단할 마음이 없었다. 두 나라는 결국 4월26일 갈등을 다시 어정쩡하게 봉합하는 로젠-니시 의정서를 체결했다. 이 합의의 유일한 의미는 러시아가 일본의 동의 없이 조선에 군사·재정고문을 파견할 수 없게 됐다는 것뿐이었다. 이로써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을 통해 만들어졌던 한반도 내 ‘러시아 우위’ 구도가 무너지게 된다.

윤치호는 러시아를 축출했다는 감격을 3월19일치 일기에 자세히 적었다. “조선은 황금 같은 기회를 갖게 되었다. 누구도 조선을 간섭하지 않는다. (중략) 아! 조선에 결정적인 시기가 될 5년이 이제 시작됐다.” 하지만, 고종이 이 기회를 잘 활용할지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길윤형 | 논설위원. 대학에서 정치외교를 공부했다. 도쿄 특파원, 통일외교팀장, 국제부장으로 일하며 일제 시대사, 한-일 과거사,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질서의 변화 등을 둘러싼 기사들을 썼다. 지은 책으로는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아베는 누구인가’ ‘26일 동안의 광복’ ‘신냉전 한일전’ 등이 있고, ‘공생을 향하여’ ‘북일교섭 30년’ 등을 번역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힘은 스스로를 냉정히 돌아볼 줄 아는 ‘자기 객관화 능력’이라고 믿는다.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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