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평등한 ‘학생인권법’이 필요해 [세상읽기]

한겨레 2024. 10. 22.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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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 회원들이 지난해 2월 서울 중구 서울시의회 앞에서 학생인권조례 폐지 움직임에 반대하며 청소년 인권 확장을 요구하고 있다. 두달 뒤 이들은 학생인권법과 청소년인권을 위한 청소년-시민전국행동(청시행)으로의 재출범을 선언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김혜정 |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10월17일 경기도교육청 남부청사 앞에 책 100여권이 놓였다. 경기도교육청이 학교에서 폐기하게 한 성평등·성교육 도서 2528권을 상징한다. 경기도교육청은 ‘부적절한 논란’이 포함된 도서를 ‘조치’하라고 일선 학교에 공문을 보냈다. ‘처리된 도서 집계 목록을 제출하라’고도 했다. 무엇이 처리 대상인가? 보수단체의 민원과 주장을 그대로 담은 목록이었다. 폐기된 도서에는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 조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 아사히 신문 출판사의 ‘와이플러스(Why+) 인체’도 있다. 폐기된 성평등 도서들은 경기도교육청 앞 기자회견에서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지만, 노벨 문학상 수상자 한강 작가가 운영하는 독립서점에는 가지런히 꽂혀 독자들에게 권해지는 책들이다. 혹자는 금서(禁書)가 된 금서(金書)라고 했다.

도서관은 누구에게나 열린 안전지대다. 빈부 격차도, 성별 격차도, 피부색과 종교, 성적 지향도 제약이 안 된다. 많은 작가들이 공공도서관이 어린 시절부터 숨 쉴 곳, 생각하는 곳이었노라고 말하는 이유다. 세계의 차별을 감지하는 감수성, 폭력에 저항하는 존엄한 힘을 써 내려간 시간은 도서관에서 가능했다. 그런데 보수단체와 그의 아바타가 된 교육청들은 학교 도서관과 그 안에서 쓰여지는 인권 감수성을 궤멸시키려 시도한다.

성평등 도서, 성교육 도서, 페미니즘 도서는 그 어느 때보다 지금 너무 필요하다. 온라인의 여성 혐오, 단톡방 성희롱, 교실의 약자 조롱은 넘쳐나는데, 이에 편승하지 않으려면 해석하는 힘이 필요하다. 젠더에 대해 말하거나 물으면 ‘너 페미야?’ 사상검증이 일어나고 질문자를 낙인찍는 마녀사냥마저 일어나는 지금, 성별에 대해, 성별 정체성과 성적 지향에 대해서는 누구에게 어떻게 묻고 토론할 수 있을까? 책과 도서관은 세계 속에서 인간이 마주한 억압과 폭력, 부당한 모순을 질문하게 한다. 그런데 책을 없애고, 인지력과 해석력, 대응력을 없애려는 세력이 교육청을 움직이고 있다. 전국 곳곳의 학생인권조례가 폐기되거나 소송 중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성차별은, 성별 이분법은 특정 학생들에게만 있는 장벽일까? 그렇지 않다. 부유하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남성 양육자가 여성 교사나 저연차 남성 교사를 상대로 위협적으로 민원을 제기하거나, 여성 혐오 행동을 과시하는 학생이 다른 학생, 여성 교사, 남성 교사에게 혐오의 말과 행동을 행사하거나, 성별 이분법적인 역할 수행을 바꾸어 교실 운영을 해보려는 교사가 도움은 못 받고 위축되는 상황을 떠올려보자. 성차별, 혐오, 불평등, 위계위력, 장애 배제의 문제가 교육에 있다면, 이는 학교 내 특정 집단에만 위협이 되는 게 아니다. 마찬가지로 교육에서 성평등, 인권 감수성, 채식 등 다양한 식사 보장, 배리어프리가 가능하다면 이를 운용하는 책임에도 모두 연결되며, 특정 집단이 아니라 모두에게 이로움이 적용된다.

지방자치단체나 시·도의회, 교육감이 얼마나 보수적인가에 따라 폐기 처분 위기에 놓였던 학생인권조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2대 국회에 ‘학생 인권 보장을 위한 특별법안’ 제정안이 발의되어 있다(김문수 더불어민주당 의원 대표발의). 학생인권법은 형사법, 처벌법이 아니다. 이는 학생인권조례와 마찬가지로 학생 인권을 명문화하고, 이를 증진하기 위한 계획 수립, 인권침해 사안에 대한 조사와 구제, 권고 시스템을 확립하도록 한다. 법이니 전국적인 체계다. 이에 대해 ‘학생 인권은 교권을 침해하는 것 아니냐’는 배타적인 긴장관계론에 입각한 반대 의견도 많다. 그런데 학생인권조례 실시 지역 학생 1만9061명 대상 설문조사 결과 적극적 학생 인권이 일정 수준 증가할 때 전문적 교권 존중 정도가 13.7% 늘어나는 경향이 드러났다. 자신의 인권이 존중받는다고 체감할수록 타인의 인권을 존중하는 ‘상호 인격적 보완관계’에 있다는 것이다(김범주, 2024).

학생 인권, 교사 인권은 장애인 인권, 군인 인권, 여성 인권, 재소자 인권, 급식노동자의 인권과 나란히 쓰여야 한다. ○○ 인권에서 ○○들은 서로 대립하지 않고 교차하고 협력한다. 성별 정체성, 성적 지향으로 인한 차별 금지도 인권적 공공지대에 반드시 필요하다. 학생인권법이 환대 속에 제정되기를 기대한다. 성평등·성교육 도서를 읽고 쓸 권리가 학생과 시민들에게 법률로써 보장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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