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숲길] 빠르다고 다 좋은 건 아냐

김재원 동화작가 2024. 10. 22.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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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원 동화작가

우리 아파트에 있던 간이우체통이 사라졌다. 처음 이사와 보니 가까운 곳에 우체통이 없었다. 작가들이 보내준 책을 받으면 편지로 답례를 하기 때문에 우체통이 없으니 불편했다. 우체국에 민원을 넣었더니 간이우체통을 분리수거장 옆에 달아주었다. 기념우표를 모아두었기 때문에 편지봉투에 붙여 종종 우체통에 넣었는데 이용률이 낮다고 이번 달부터 없어졌다. 이제는 편지를 부치려면 어쩔 수 없이 멀리 떨어진 우체국까지 가야만 한다.

요즘에는 대체로 편지를 쓰지 않는다. 휴대전화로 문자를 보내는 것이 훨씬 간편하고 빠르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편지를 보내야 한다면 느린 일반 우편 대신에 빠른우편을 이용한다.

그렇다면 느린 것은 모두 사라져야만 할까? 사람들은 느린 것을 못 참지만 자연에서는 느려도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례가 많다. 배추를 심으면 잎을 노리는 해충들이 득실거린다. 배추흰나비 애벌레, 청벌레, 벼룩잎벌레, 방아깨비, 메뚜기, 진딧물에 달팽이까지 있다. 달팽이는 약을 쳐도 잘 죽지 않고 그물을 씌워 놓아도 틈새로 들어와서 배춧잎을 갉아 먹는다. 느리니까 금방 잡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의외로 쉽지 않다. 배춧잎 뒤에 숨어 있기도 하고 이른 아침에 식사(?)를 하고는 해가 뜨면 흙이나 멀칭한 비닐 안으로 감쪽같이 숨어버린다. 그러니 여간 부지런하지 않고서는 달팽이를 소탕 할 수가 없다.

나무에 매달려 사는 늘보 역시 한없이 느린 동물이다. 느림보라는 의미의 늘보는 역설적으로 느리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1분에 4m 정도로 느리게 움직이니까 체력소모가 심하지 않아서 하루에 나뭇잎 석 장만 먹어도 견딜 수 있다. 늘보는 털에 이끼 같은 녹조류가 자라기 때문에 그걸 뜯어먹고 영양 보충을 한다.

이처럼 자연 생태계에서는 느려도 얼마든지 살아가지만 사람 세상에서는 느린 것들이 점점 퇴출당하고 있다. 완행열차가 없어졌고 느린 여객선 대신에 쾌속선이 등장했는가 하면 국도 대신에 고속도로가 차들로 몸살을 앓는다. 주문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요리보다 패스트푸드를 찾고, 옷도 품을 재고 재단한 뒤에 가봉 과정을 거치는 맞춤복보다 매장에서 바로 입어볼 수 있는 기성복을 원하며 구두 역시 다 만들어 놓은 것을 즉석에서 신어보고 산다.

전국이 1일 생활권에 들어왔고 냉장고에 세탁기는 물론 로봇청소기에 식기세척기까지 있는 데다 밥을 하지 않아도 간편하게 데워 먹을 수 있는 즉석밥까지 있건만 사람들은 여전히 바쁘고 시간이 없다고 아우성이다. 조선 시대에는 부산에서 한양까지 가는데 한 달 정도가 걸렸고 밥할 때는 일일이 불을 피워 해먹었는데도 시간이 없다고 푸념하지는 않았다.

초고속 인터넷 시대라 무조건 빠른 것이 좋을 것 같지만 번갯불에 콩 볶아 먹을 수 없듯이 우리 주위에는 여전히 느린 문화가 많이 남아 있다. 찬찬히 책을 읽고 차근차근 기초를 다져가야 하는 학생이 그렇고, 김치나 장을 담그면 익을 때까지 우직하게 기다릴 줄 알아야 하며, 중요한 시험을 본 수험생들은 즉석에서 발표가 나오지 않으니 답답하더라도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만 한다.

부부가 아이를 만들어도 금방 태어나지는 않는다. 아무리 빠른 고속화 시대라고 해도 열 달이 지나야 아기 얼굴을 볼 수 있지 않는가. 태어난 아기 역시 아무리 좋은 영양식을 먹여도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지는 않는다. 기고 일어서고 아장아장 걷고 유아원을 거쳐 초등학교에 가기까지는 무려 7년이나 걸린다.


사람이 제대로 성장하고 사람 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대기만성이라는 말처럼 차근차근 채워 나가야 한다. 책을 천천히 읽고 곰곰이 생각하는 가운데 두뇌가 발달하고, 호기심을 갖고 찬찬히 살펴보며 질문을 던질 때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인터넷이나 컴퓨터는 맡은 업무를 빠르게 해줄 뿐이지 사람을 대신할 수는 없다. 아무리 AI 시대라고 해도 최종 결정은 사람이 해야만 한다. 빠르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니 여유를 갖고 주변을 돌아보며 느긋하게 살아가야 하지 않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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