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서 칼럼] 북한군의 우크라 파병, 격랑의 한반도

박영서 2024. 10. 22.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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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서 논설위원

1964년 박정희 정권은 베트남에 병력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그해 7월 국회에서 파병 동의안이 통과되자 정부는 두달 후인 9월 1개 의무중대, 태권도 교관들을 베트남으로 보냈다. 1965년 3월에는 공병부대인 비둘기부대가 베트남으로 건너갔다. 그해 10~11월에는 전투부대가 파병됐다. 맹호·청룡부대가 각각 캄란과 퀴논에 도착해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다음해 백마부대 등의 추가 파병이 이뤄졌다.

문제는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이 한국 본토에서의 대북 방위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한국 국회에서 파병안이 심의되었을 때 이 문제는 최대 쟁점이었다. 북한은 이 약한 고리를 치기로 했다. 백마부대 파병이 본격화됐던 1966년 10월부터 '무장공비'로 흔히 부르는 게릴라 부대를 남한에 침투시켰다.

남북 간 군사대결의 강도가 높아지는 이런 상황에서도 미국은 전투부대 추가 파병을 한국 정부에 요구했다. 추가 파병 협상이 진행됐으나 초대형 사건이 터졌다. 1968년 1월 21일 저녁 북한 124군 부대 소속 특수부대원 31명이 "박정희 모가지 따기 위해" 청와대 앞까지 왔다가 우리 군경과 교전한 것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사실에 온 국민은 경악했다. 더 경악한 것은 박정희 정권이었다. 한반도는 준(準)전시 상태가 됐다. 군인들의 제대는 연기됐고 향토예비군이 창설됐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교련 교육이 실시됐다. 북악산 등 일부 지역의 민간인 통행도 일절 금지됐다.

북한의 도발은 남한의 관심을 남북 대결로 돌려 남베트남에 대한 남한의 군사적 지원을 줄이려는 의도였다. 이는 효과를 거뒀다. 한국군 추가 파병은 무산됐다.

한국군 베트남 파병은 최초의 해외파병이었다. 8년 6개월 동안 32만여명의 한국 군인들이 베트남 전쟁터로 파병됐다. 김추자의 노래에선 '새까만 김 상사'는 훈장 달고 돌아왔지만 5000여명의 다른 청춘들은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대신 남한은 '달러'를 확보했고 군 현대화를 진행했다.

역사는 돌고 돈다. 이번에는 북한이 해외 파병에 나섰다. 지상군을 외국에 파병한 것은 정권 수립 이후 처음이다. 국정원에 따르면 이미 1500명이 청진·함흥·무수단 인근 지역에서 러시아 태평양함대 소속 함선을 타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1차 이동했다. 조만간 2차 수송 작전이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국정원은 북한이 최정예 특수작전부대인 11군단, 소위 '폭풍군단' 예하 4개 여단 소속 병력 1만 2000여명을 우크라이나에 파병할 것으로 관측했다. 폭풍군단은 특수 8군단을 모체로 만들어진 부대다. 특수 8군단은 1968년 1·21 청와대 습격사건을 일으킨 124군 부대를 중심으로 1969년에 창설됐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북한군의 역할과 전세에 미칠 영향을 두고는 전문가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북한군의 러시아 지원이 '게임 체인저'가 될지는 미지수이지만 우크라이나에 상당한 압박으로 작용할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일단 우크라이나는 바짝 긴장하고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북한이 파병을 준비하고 있다면서 "세계대전을 향한 첫 단계"라고 말했다.

남한의 베트남 파병과 북한의 우크라이나 파병은 시대와 배경은 다르지만,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작은 국가들이 직면하는 선택의 문제,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북한은 돈과 기술이, 러시아는 병력과 탄약이 필요했다. 이는 두 나라를 '혈맹'으로 묶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혈맹'은 기존의 대북 문제뿐만 아니라 국제안보 질서 자체를 뒤흔들고 있다. 북한 참전의 맞대응 차원에서 나토 회원국들이 일부라도 참전할 경우 전쟁의 성격 자체가 바뀔 수도 있다.

이제 한반도에 위기가 발생할 경우 러시아의 군사개입까지 염두에 둬야하는 상황이 됐다. 한반도가 신냉전의 최전선이 될 조짐이다. 이는 우리에게 평화를 위한 새로운 발상의 전환을 재촉하고 있다. 기존 외교·안보 노선에 대한 냉정한 복기와 함께 보다 전략적 사고가 요구되는 '중대 시기'에 접어들은 것이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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