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사소한 친절’, 그 혁명적 선택

한겨레21 2024. 10. 22.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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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기호의 이야기 사회학]클레어 키건 소설 속 사람들이 삶의 이물감을 대하는 법… ‘맡겨진 삶’의 진실을 직시하고, ‘맡겨진 존재’에게 건네는 용기
클레어 키건의 ‘이토록 사소한 것들’은 같은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아가며 삶의 터전을 일구고 있는 펄롱의 삶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일상적으로 석탄을 배달하러 간 수녀원에서 한 소녀를 만나며 흔들린다. ‘이토록 사소한 것들’ 영화 트레일러 영상 캡처
클레어 키건의 ‘이토록 사소한 것들’은 같은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석탄배달원 펄롱은 수녀원에서 한 소녀의 진실을 마주한다. ‘이토록 사소한 것들’ 영화 트레일러 영상 캡처

 *이 글에는 클레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 ‘맡겨진 소녀’와 ‘삼림 관리인의 딸’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내용을 알고 싶지 않은 독자는 읽지 않기를 권장합니다.

삶에는 언제나 해명되지 않는 불길한 이물감이 있다. 그것은 내 삶에 들어와 있는 어떤 존재일 수도 있고 사건일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사람과 사건으로 알게 된 자기 자신의 어떤 타자성의 면모일 것이다. 따라서 이물감을 주는 존재가 내 삶에 끼어드는 것만큼 성가시고 불길한 일은 없다. 단지 귀찮은 사건을 일으켜서만이 아니다. 내 안에 가라앉아 있던 이물감을 일깨워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지만 말이다.

회피할 것인가, 직시할 것인가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학생들에게 하는 첫 질문이 ‘삶의 이물감을 어떻게, 무엇으로 느끼는가’ 하는 점이다. 이야기하고 싶다는 것은 해명하고 싶은 것이 있음을 뜻한다. 다만 그것을 ‘무엇에 대한 이야기로 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내 삶에 침투해 삶을 뒤흔들고 파괴하는 이물감으로 그릴 것인가, 아니면 그것이 깨우는 자신의 진실이라는 이물감을 드러낼 것인가. 아니면 더 나아가 그렇게 살아가는 삶 자체를 이물감으로 건드리며 인간의 (구원) 가능성을 고양하는 이물적 존재가 되는 길을 선택할 것인가.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이 세 가지 차원의 이물감이 전환해가는 과정을 촘촘한 서사로 보여준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빈주먹으로 시작했지만,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아가며 삶의 터전을 일구고 있는 펄롱의 삶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일상적으로 석탄을 배달하러 간 수녀원에서 한 소녀를 만나며 흔들린다. 그 소녀는 “저한테는 아무도 없어요. 그냥 물에 빠져 죽고 싶어요. 우리한테 씨발 그것도 못해줘요?”라고 말한다.

소녀가 흔드는 것은 단지 펄롱의 외형적 일상만이 아니다. 물론 이 소녀의 출현은 펄롱의 외부적인 일상에 대단히 위협적이다. 펄롱의 아내 아이린은 “우리랑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며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라고 말한다. 삶에 개입하는 이물감을 처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삶의 이물감으로 여기고 제거하는 것이다. 더구나 그 개입이 삶을 위협할 정도로 권력과의 대립을 야기할 수 있다면 말이다. 이 자체로도 훌륭한 이야기가 된다.

이물감의 출현이 권력과 사회에 도전하는 것만으로 위협적인 것은 아니다. 근대적 이야기는 언제나 주인공 내면의 세계로 이야기의 무대를 전환한다. 이물감의 등장은 주인공의 정체성, 자기 존재의 진실과 정당성에 대한 도전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더 위협적이다. 주인공은 이물적인 존재의 출현으로 자기 자신의 진실이라는 이물감을 마주 대하게 된다. 그 진실은 일상을 뒤흔들고 파괴할 수도 있다. 진실이 이물감인 이유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거나 억압돼 있기 때문이다.

이물감의 존재를 대하는 주인공의 마음은 이중적으로 양가적이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자신의 진실이기에 알고 싶은 강력한 욕망이 작동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그 진실이 자기 삶을 파괴할 수도 있음을 알기 때문에 회피하려는 반대의 욕망 또한 강력하게 추동된다. 일상이냐, 진실이냐는 두 선택지 사이에서 주인공의 마음은 팽팽히 대립한다. 그 흔들림이 일상만을 파괴할 뿐 진실을 안다 하더라도 도로 자기 운명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

형태에 맡겨진 삶을 살아갈 뿐

키건의 ‘맡겨진 소녀’에서 동생이 태어나는 동안 잠시 아는 사람의 집에 맡겨진 주인공은 “아빠가 나를 여기 두고 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지만 내가 아는 세상으로 다시 데려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든다”고 말한다. 사랑이 아니라 그저 살아가는 것만이 있는, 전혀 따뜻하지 않은 집을 떠나 “여유가, 생각할 시간이… 여윳돈이” 있을지도 모르는 이 집에 있고 싶은 마음도 있고, 그래봤자 머지않은 시간에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도 알기 때문이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운명은 바뀌지 않는다. 타인의 힘으로 내 운명이 결정되기를 바라는 ‘맡겨진 마음’으로는 말이다.

적극적이라고 하여 ‘맡겨진 마음’이 아닌 것이 아니다. 키건의 소설은 이 진실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이야기한다. 키건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하층민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 사랑이나 진실 따위는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가족을 만들고 일하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그것은 그들이 가진 몇 안 되는 것들이며, 또 가질 수 있는 몇 안 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가진 것과 가질 수 있는 것들을 지키는 것이지 ‘의미’ 따위가 아니다.

‘삼림 관리인의 딸’은 이 점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주인공 빅터 디건은 빚내서 형제들의 땅까지 사들인다. 그리고 바로 자기와 결혼할 여자를 찾아 도회지로 나간 뒤 마샤를 만나 끈질기게 구애해 결혼한다. 마샤는 그를 사랑하지 않지만 그녀에게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결혼한다. 둘의 결혼은 사랑도 존중도 없는 삶이지만 디건에게는 문제가 아니다. 그에게는 이 형식을 갖췄다는 것이 중요하다. 디건이 가장 소망하는 것은 은퇴한 뒤 ‘편안한 삶’으로 물러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식들도 키워야 하고 생활비를 내야 하며 저당 잡힌 땅에 대한 빚도 갚아야 한다. 그는 사랑이니 뭐니는 물론이고 자신이나 마샤, 혹은 자식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할 시간”이 없다. 자신이 가져보지 못했기에, 강렬히 가지기를 원하는 형태에 맡겨진 삶이다.

이 맡겨진 삶의 실체는 폭력이며 파국의 연장일 뿐이다. ‘삼림 관리인의 딸’에서 섹스란 남자가 여자는 자기 소유라는 것을 확인하는 의례 행위다. 이야기꾼인 디건의 아내 마샤가 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재밌게 들려준 다음 디건은 “항상 여자를 침대로 데려가서 그녀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것임을 그녀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확인”했다. 디건에게 중요한 것은 소유를 확인하고 가진 것을 지키는 것이지 그것이 정말인지를 묻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자기 아들과 딸이 친자인지 아닌지도 중요하지 않다. 아니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자기 집에 있는 자기 것이면 된다. 그만큼 그에게 중요한 것은 가지는 것이다.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어”

구원은 마샤가 자신이 디건의 삶에 맡겨진 존재가 아니며 이물적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으로 시작됐다.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처럼 보이지만 디건이 자기 삶의 진실을 외면하고 있던 사이에 그의 삶에는 끊임없이 이물적 존재들이 출현했음을 직시하게 한다. 그 누구도 그에게 삶을 소유당한 채 살지만은 않은 것이다.

시대의 운명에 삶을 맡긴 것은 디건 자신뿐이었다. 다만 그는 ‘소유’를 통해 그 이물적 존재를 자기 영토 안에 가진 것으로 포획했을 뿐이다. 그 모든 것이 불타야 구원은 시작된다. 그러면 진실을 증언한 자에게 “미안하냐”고 추궁하는 것이 아니라 ‘맡겨진 삶’이라는 자신의 진실을 고백할 수 있게 된다. “난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몰랐어.” 그래야 비로소 “그렇게 밝은 적이 없는” 새로운 길이 이들 모두에게 열린다.

물론 하층민들이 그나마 가진 것을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혹은 가질 수 있는 것에 애착하며 지키려고 하는 마음을 우습게 봐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에게 그것을 잃는 것은 세계를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것을 어리석고 동물적이라고 비웃는 것이야말로 몇 개를 잃더라도 잃은 것이 별로 없이 전부로서의 세계는 여전히 소유한 사람들의 역겨운 속물적 태도일 것이다.(나는 이 마음 때문에 지금 전세계적으로 많은 좌파가 하층 노동계급의 마음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렇기에 가지지 못한 이들이 가진 것을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공포와 가질 수 있는 것을 향한 갈망이 사실은 자기들이 진정으로 살고 싶은 세계를 파괴할 뿐이라는 이 끔찍한 진실을 마주 대하는 것은 혁명적인 일이다.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몰랐다”는 말이 의미하듯 그것은 맡겨진 삶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이 삶이 얼마나 동반자들을 착취하고 파괴하는 폭력인지를 직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맡겨진 삶의 이물감을 생각해야 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맡겨진 것이 아니라 원하는 것. 이것이 이물감으로 우리 목에 걸려 있어야 한다. 그 이물감은 맡겨진 삶 동안 무엇을 경험했는가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서 수녀원에서 학대당하던 소녀를 집으로 데려오기를 결심하며 펄롱은 깨닫는다. 세상에 맡겨진 마음만 있었다면 자신은 태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세상에 마음을 맡겨버린 사람들만 있지 않았다.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 속에서 보여줬던 친절과 격려와 가르침의 경험이 한데 합쳐서 삶을 이루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서 펄롱이 윌슨 부인에게 받고, ‘맡겨진 소녀’에서 소녀가 에드나 아주머니와 킨셀라 아저씨에게 받은 것도 그런 것이다. 이 경험이 우리가 자신에게 맡겨진 존재를 향한 용기를 선택하게 한다.

맡겨진 존재를 향한 용기

이 선택이 혁명적인 것은 “한통속”인 세상에 대항해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이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평생 지고 살아야 할”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으로서의 최악의 일은 끝내버리기에 혁명이다. 이 혁명은 우리 존재 자체를 세계에 이물감으로 드러내는 일이 될 것이다. 이 이물감이 된 우리 앞에서 세계가 그 자신의 추한 진실을 고백하도록 말이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맡겨진 존재이고 누군가를 맡고 있다. 우리가 맡고 있는 존재에게 친절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를 세상에 맡겨진 삶에서 벗어나게 한다. 인간에게 구원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친절이 용기를 내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학기 ‘자기 이야기를 어떻게 서사화할 것인가’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묻는다. 이번 작품을 쓰게 하는 너의 목구멍에 걸린 이물감은 무엇이냐고, 그것을 이번 학기 동안 같이 찾아보자고.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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