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개월째 공석… 유한양행은 왜 그때 '회장직 신설' 밀어붙였나

강서구 기자 2024. 10. 22.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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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쿠프 이슈 後
유한양행 회장직 신설
7개월의 기록과 의문
1969년 전문경영인 체제 도입
3월, 28년 만에 회장직 부활
기업 사유화 의혹까지 제기돼
유한양행 “직급 유연화 조치”
논란 끝에 회장직 신설했지만
7개월 넘게 공석으로 비워둬
회장직 신설 둘러싼 의문들

지난 2월 유한양행이 회장직을 신설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논란이 일었다. '주인 없는 회사'인 유한양행을 누군가 사유화하려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됐기 때문이다. "인재 영입을 위한 선제적 조치"란 회사의 반박이 통했는지, 유한양행은 3월 열린 주주총회에서 회장직을 신설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회장직을 둘러싼 논란은 7개월이 흐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유한양행이 올해 3월 개최한 주주총회에서 28년 만에 회장직을 부활시켰다.[사진|뉴시스]

지난 3월 15일 주주총회가 열리는 유한양행 본사 앞에서 트럭시위가 벌어졌다. 시위에 나선 이들은 다름 아닌 유한양행 임직원이었다. 유한양행 임직원이 트럭시위까지 벌인 건 회사가 발표한 '회장·부회장직 신설 소식' 때문이었다.

유한양행은 3월 정기 주주총회를 앞두고 "회장직과 부회장직을 신설하겠다"면서 정관 변경안을 상정했다. 1996년 연만희 전 회장이 물러난 후 사라진 회장직과 부회장직을 부활시키려 했던 거다. 기업이 회장직을 만드는 것이 뭐 그리 대수냐고 여길 수 있지만 유한양행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유한양행은 일찌감치 소유와 경영을 분리했다. 이 회사가 '지배구조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이유다. 1926년 유한양행을 설립한 창업주 유일한 박사는 회사경영에서 친인척을 철저하게 배제했다. 1939년 국내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도입했고, 1969년부터 전문경영인에게 회사를 물려줬다. 이 과정에서 "친척이 있으면 회사 발전에 지장을 준다"며 부사장을 지낸 아들과 조카를 해고하기도 했다.

유한양행은 전문경영인 체제를 55년째 유지하고 있다. 그 결과, 올 2분기 기준 1999명에 달하는 유한양행 임직원 가운데 창업주의 친인척은 한명도 없다. 회사를 쥐락펴락할 수 있는 뚜렷한 대주주도 없다. 유한양행의 최대 주주는 15.82%의 지분을 보유한 유한재단이다. 2대 주주는 국민연금공단(9.67%)이고, 자사주(8.32%), 유한학원(7.75%) 등이 5% 이상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 '회장·부회장직을 신설하겠다'고 나섰으니, 유한양행 임직원들이 반발하는 게 이례적인 일은 아니었다. 사실 그럴 만한 이유도 있었다. 유한양행은 2021년에도 정관을 변경해 기존에 없던 이사회 의장직을 신설했다. 대표이사가 이사회 의장직을 겸임하던 관례를 스스로 무너뜨린 셈이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자리를 2021년까지 유한양행을 이끌었던 이정희 전 대표가 맡았다.

당연히 '대표이사를 견제해야 할 이사회 의장에 전직 대표를 선임한 것이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일었다. ESG 경영에 나선 기업들이 사외이사를 이사회 의장으로 선임해 견제·균형을 강화하는 '선임 사외이사 제도'를 도입하는 것과는 다른 행보란 지적도 쏟아졌다.

[사진 | 연합뉴스]

회장직 신설이 누군가의 임기 연장을 위한 도구가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특히 재선임에 성공한 조욱제 대표의 임기가 3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건 그런 의혹에 불을 지폈다. 유한양행의 대표는 3년 임기로 1차례 연임만 가능하다.

논란이 일파만파로 확산하자 유한양행은 강하게 반박했다. 지난 2월 22일 발표한 입장문을 통해 "회장·부회장직 신설은 회사의 목표인 글로벌 50대 제약회사로 나아가기 위한 선제적인 직급 유연화 조치"라며 "우수한 외부인재 영입을 위해서도 필요한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논란의 당사자도 진화에 나섰다. 조 대표는 3월 15일 열린 주총에서 "회장·부회장직 신설에 사심이나 다른 목적이 있지 않다"고 선을 그었다. 이정희 이사회 의장도 "회장을 맡을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렇다면 유한양행이 회장직 신설을 밀어붙인 이유는 뭘까. 표면적 이유는 '인재 영입'이다. 글로벌 제약사로 도약하려면 우수한 외부인재를 영입해야 하는데, 그 인재가 높은 직급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는 게 유한양행의 주장이다.

조 대표의 말을 들어보자. "인재를 영입하려면 사장이나 부사장 등의 직급이 필요하다. 회장 등의 직제가 없는 현행 구조로는 매번 인재를 영입할 때마다 주주총회를 열어야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변경 전 유한양행의 정관을 살펴보면, '이사회의 결의로서 이사 중에서 사장, 부사장, 전무이사, 상무이사, 약간인을 선임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

이사를 상법상(382조) 주주총회에서 선임해야 한다는 걸 감안하면 유한양행의 주장처럼 사장과 부사장급 인재를 영입하려면 주총을 거쳐야 하는 게 맞다. 유한양행 측이 '회장·부회장직 신설'을 정관에 넣으려 했던 이유다. 어쨌거나 유한양행의 정관 변경안은 참석한 주주 95%의 찬성을 받아 주총을 통과했다.

유한양행의 의도대로 '회장·부회장직'을 신설하긴 했지만 논란이 완전히 수그러든 건 아니다. 주총이 끝난 지 7개월이나 흘렀지만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숱하다. 첫째 의문은 인재 영입이 이유라면 굳이 회장직을 신설할 필요가 있었느냐는 거다. 부사장이나 전무 직급으로도 인재 영입이 가능하다는 이유에서다.

한 기업지배구조 전문가는 "정관만 변경하면 대표 이사도 이사회 의결로도 선임할 수 있다"며 "상법상으로는 회장직의 유무와는 큰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전 직급이 사장이었다고 꼭 사장으로 인재를 영입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냐"며 "회사의 직급 체계에 맞게 직급을 부여하고, 보수체계만 제대로 갖추면 될 일"이라고 밝혔다.

회장직을 왜 그때 신설해야 했는지도 의문거리다. 유한양행이 주총에서 '회장직 신설'에 성공하긴 했지만 그후 7개월째 그 자리는 공석이다. 유한양행 측도 "당장 회장을 선임할 계획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렇다면 기업이 성장하면서 조직이 커질 것을 대비해 회장직을 선제적으로 만들었다는 건데, 이를 두고 뒷말이 나온다.

익명을 원한 바이오·제약 업계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자. "유한양행의 폐암치료제 신약 '렉라자'가 올해 1월부터 1차 치료제로 건강보험 급여 적용을 받았다. 2월엔 렉라자가 미 식품의약국(FDA) 우선 심사 대상으로 지정됐다. 이들은 유한양행이 가파른 성장세를 기대할 만한 호재임에 틀림없다. 그러니 속된 말로 어깨에 힘을 줄 때라는 인식이 '회장직 신설'로 나타난 것 아니겠는가."

그는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회장직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회장이 있어야 자회사 사장을 영입하는 데 모양새가 난다는 의미 아니겠냐. 국내 대기업 중 주인이 없는 회사지만 회장 직제를 운용 중인 곳이 적지 않다. 회장직을 만든 게 문제가 아니라 거기 이상한 사람을 꽂아 넣을 수 있다는 게 더 큰 우려다."

그의 말처럼 '회장직'은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 내부 인사로 회장직을 채우면 '옥상옥' 논란에 휘말릴 수 있다. 외부인사를 영입하면 '낙하산 논란'이 벌어질지 모른다. '회장 선임'을 두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주인 없는 회사의 전철前轍을 유한양행이 밟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거다.

투자업계 관계자는 "금융지주회사, KT 등 여러 주인 없는 회사의 회장직을 둘러싸고 발생한 문제는 한두개가 아니다"면서 "회장직을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유한양행에 리스크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논란 속에 회장직을 신설한 유한양행은 어떤 밑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강서구 더스쿠프 기자
ksg@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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