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주연 이도령 맡은 ‘춘향전’ 대본... 60년 배우의 길 시작

이태훈 기자 2024. 10. 22.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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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현대사 보물] [64] 배우 전무송
배우 전무송이 걸어온 길은 척박한 땅에 씨 뿌리고 싹 틔워 꽃을 피워낸 한국 연극의 역사와 겹쳐진다. 고양시 자택 거실 책장 앞, 그가 1977년 연극 ‘하멸태자’ 네덜란드 공연 때 암스테르담에서 산 ‘하멸태자 코트’를 걸치고 활짝 웃었다. 손에 든 것은 대표작 중 하나인 연극 ‘태(胎)’의 대본. 테이블 위 왼쪽에 젊은 시절 어렵게 마련한 셰익스피어 전집이 있다. /김지호 기자

절삭기로 나사를 깎아낼 때마다 쇳밥이 쌓였다. 그 쇳밥에 하루하루 더 붉게 녹이 슬고 있었다. 1961년 인천기계공고를 졸업하고 철공소에 취직한 갓 스물 청년 전무송(83)은 “녹슨 쇳밥이 꼭 나 같더라”고 했다. 1주일 만에 그만두고 신문사 인천 지국에 총무로 취직했다. 그가 배우 일에 관심 있다는 걸 알게 된 지국장이 준 연극표 두 장이 인생 행로를 바꿨다. 1962년 4월 물어 물어 서울 남산 드라마센터를 찾아간 전무송은 개관 기념 연극 ‘햄릿’을 봤다. 당대 최고의 햄릿 김동원(1916~2006)과 장민호(1924~2012), 황정순(1925~2014) 등이 출연하고 이해랑(1916~1989)이 실질적 연출을 맡았으며 ‘한국 현대연극의 대부’ 유치진(1905~1974)이 연출가로 기록된 ‘전설’들의 작품이었다. “이런 세계가 다 있구나 싶었지. 황홀했어요.” 팸플릿 뒷면에 연극아카데미(현 서울예대 전신) 1기생 모집 공고가 있었다. 연극이 먼저 그에게로 온 것이다.

◇첫 주역 영광 ‘춘향전’ 대본

기본기 없이 시작한 연기가 쉬울 리 없었다. 수업 때마다 야단맞는 게 일이었다. 1학년 첫 공연인 유치진 선생의 ‘소’에서 단역을 맡았다가 연출가에게 혼쭐이 났다. “그게 술 취한 거냐, 깡패 걸음이지. 인천 가서 깡패나 해!” 울면서 인천 집으로 돌아갔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서울로 돌아왔다. 진눈깨비 내리는 서울역 앞, 포장마차에서 막걸리 한 잔 마시고 허공에 주먹질을 하며 외쳤다. “두고 봐! 진짜 배우가 될 거야! 진짜 연기를 할 거야!” 드라마센터에서 숙식하다시피 연기 공부에 몰입했다. 단역만 해도 좋겠다 싶었던 졸업 공연 ‘춘향전’에서 그는 첫 주연 ‘이도령’으로 호명됐다. 그 공연을 본 차범석(1924~2006) 선생이 신문 기고를 통해 호평했다. “드라마센터 연극아카데미에서 좋은 배우들이 나올 것 같다.” 최근 경기도 고양시 자택에서 만난 전무송은 한 장 한 장 파일에 넣어 보관 중인 그 대본을 꺼내 보여줬다. “여기서 모든 게 시작된 것 같아.” 연극아카데미는 이후 수많은 한국 대표 배우들을 길러낸 우리 연극의 ‘못자리’가 됐다.

◇굶어도 좋았던 ‘셰익스피어 전집’

연극아카데미에서 인연이 된 유치진 선생을 그는 지금도 ‘영혼의 아버지’로 여긴다. 선생은 술에 취하면 실수가 있었던 혈기방장한 그를 불러다 앉히고 말했다. “훌륭한 배우가 되려면 말하는 데 10년, 무대에 서는 데 10년이다. 좋은 배우가 되려면 우선 인간이 돼야 해.” 전무송은 “그 말씀을 평생 가슴에 새기고 살았다. 아직도 진짜 배우 되려면 멀었지만, 그 경지에 다다르고 싶은 욕심은 여전히 품고 있다”고 했다.

1세대 평론가 여석기(1922~2014)의 연극아카데미 연극사 강의는 시종 ‘셰익스피어’였다. 셰익스피어를 읽고 싶어도 가난한 연극배우에겐 언감생심. 책 외판을 하던 친구가 책값 절반을 부담하며 할부로 전집을 그에게 안겨 줬다. 휘문출판사가 펴낸 1964년판, 지금도 최고의 번역 중 하나로 꼽히는 고 김재남 동국대 교수의 역작이다. “내 연극엔 한국 유치진, 한국 바깥 셰익스피어 딱 두 사람뿐이었어. 특별한 수입도 없던 시절, 할부금 내느라 끼니 거르기 일쑤였지만 저 책만 보면 행복했지.” 손때 묻은 셰익스피어는 지금도 거실 책장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꽂혀 있다. 지금껏 그의 연극 인생을 비춰준 등불이다.

◇韓 연극 첫 해외 공연 ‘하멸태자’ 코트

전무송의 이름은 오랫동안 연극계에서 햄릿과 동의어였다. 햄릿을 한국식으로 번안한 ‘하멸태자’가 좋은 반응을 얻자, 동랑 레퍼토리 극단을 이끌던 유덕형 연출가가 뉴욕 공연을 결심했다. 1977년, 한국 연극사 최초의 해외 공연이었다. 초청받은 미국 뉴욕 라마마 극장 무대에서 전무송은 주인공 ‘하멸(햄릿)’이었다. 신구, 이호재 등 당대 최고 배우들이 함께 했다. “자막도 없는데 미국 관객들이 엄청 집중하더라고. 다 아는 이야기라 그런가. 공연 끝나고 절을 했더니 우박 소리 같은게 ‘우르르’ 나서 지붕이 무너지나 쳐다 봤어. 그게 발 구르는 소리더라고. 기립박수라는 게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지.”

라마마 극장은 한국에서 온 햄릿, ‘하멸태자’ 공연을 네덜란드의 자매 극장에 연결했다. 네덜란드 주요 도시와 프랑스까지 ‘하멸태자’와 ‘태(胎)’ 공연이 석 달여 이어졌다. 쉬는 날 시내 광장에서 할인 매대에 걸린 진홍색 코트를 한 벌 장만했다. 허리 치수 27이던 젊고 훤칠한 전무송이 입자 옷태가 대단했다. 그에겐 ‘하멸태자 코트’다. ‘하멸태자’는 그해 오프브로드웨이상 후보에도 올랐다.

배우 전무송의 보물. 전 배우가 처음으로 주연을 맡았던 드라마센터 연극아카데미 1기 졸업 공연 ‘춘향전’ 대본과 영화 ‘만다라’(1981) 출연을 제안하며 임권택 감독이 직접 보낸 김성동 작가의 원작 소설책. /김지호 기자

◇임권택이 보내준 소설책 ‘만다라’

그의 연기 인생을 이끈 또 한 명의 스승은 극단 산울림의 임영웅(1934~2024) 선생이다. 선생이 절친인 이호재와 전무송을 양쪽에 끼고 어깨동무를 하면 키가 큰 두 사람이 허리를 숙여 선생의 팔 아래로 들어갔다. 하루는 남산 드라마센터 연극 공연 뒤 명동에서 술을 한 잔 산 임영웅 선생이 “보여줄게 있다”며 전무송을 택시에 태웠다. 자택을 허물어 짓던 마포의 산울림 소극장 터파기 현장이었다. 그 현장을 보며 임 선생은 전무송에게 “우리, 좋은 연극 하자”고 말했다. 전무송은 “그 말씀이 지금도 내 마음의 등대와 같다. ‘우리, 좋은 연극 하자’, ‘우리, 좋은 연극하자’ 늘 마음 속으로 되뇌인다”고 했다. “내게 잊을 수 없는 은인 같은 분이에요. ‘형’이라 부르고 싶었지만 한 번도 그리 부르지는 못하고 늘 ‘선생님’ 하고 불렀지만.”

연극계에선 이미 최고의 배우였지만, 더 많은 대중이 그를 알게 된 건 임권택 감독의 영화 ‘만다라’(1981)에 승려 ‘지산’ 역을 맡으면서였다. 당시 전무송은 연극만 고집하던 배우. 연극 분장실로 찾아온 임 감독은 출연을 제안하며 김성동 소설책 ‘만다라’를 그에게 보내줬다. 출연은 결정했지만 역할이 도저히 그려지지 않아 이름난 스님 한 분을 찾아뵙기로 한 전날 밤, 전무송은 꿈을 꿨다. 잿빛 승복 차림 스님이 메고 가던 낡은 바랑이 라면 한 봉지와 담배갑이 든 검은 비닐 가방으로 바뀌는 꿈이었다. 전무송은 “그 꿈을 꾸고 스님의 구도와 만행은 배우의 연기와 둘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고 했다.

“배우에겐 그런 깨달음의 순간이 있어요. 절실함이 극치에 이르렀을 때 문득, 화두 든 스님들에게 찾아오는 것 같은. 절실하게 긍정하면 길이 보이고, 길이 보이면 완성으로 가는 거지. 평생 연기하며 이 나이에 이르러 좀 건진 거라면 그 깨달음 하나뿐이야.” 그는 “영화 ‘만다라’를 통해 사람이 무엇이고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인연은 무엇이며 세상은 어떻게 봐야 하는지의 문제들을 들여다보게 됐다. 그걸 보게 될 때에야 유치진 선생이 말씀하신 ‘인간’이 되는 것 아닐까”라고 했다.

전무송은 내달 15일부터 약 한 달 동안 서울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 연극 ‘더 파더’를 올린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 공연. 앤서니 홉킨스가 치매 노인을 연기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영화의 프랑스 원작 희곡이다. 딸 전현아 배우가 다시 극중 딸 역할로 함께 한다. “작년에 암 진단을 받고 병상에 누워 받은 대본이었어. 처음엔 ‘내 몸도 아픈데 환자 역이라고?’ 싶었는데,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그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세계가 보이는 거야.” 전무송은 “이전까지는 흉내 내는 거였다면 이제 내가 나를 만들어내고 싶다”고 했다. 그는 60년 연기 인생의 내공을 이 연극 한 편에 모두 쏟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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