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태평양’을 넘어설 지역 전략을 묻는다 [세상읽기]

한겨레 2024. 10. 21.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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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1일(현지시각) 라오스 비엔티안 국립컨벤션센터(NCC)에서 열린 동아시아 정상회의(EAS)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양희 | 대구대 경제금융학부 교수

한국은 화자에 따라 동아시아, 아시아·태평양(아태), 인도·태평양(인태) 등 지역명이 각축전을 벌이는 지정학적 단층선에 위치해 있다. 미국은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쥐고자 아태지역을 내세워 자신을 편입시켰고, 급기야 일본과 손잡고 인태지역이라는 공간을 창출해 인도를 불러냈다. 이리하여 중국이 인태지역 일원인지는 아리송하나, 한국은 어디에든 속한다고 여겨지는 기묘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영어 문헌 속 등장 빈도(구글 북스 엔그램 뷰어)에도 이런 변화 흐름이 감지된다. ‘동아시아’는 2004년을 정점으로 감소 일변도이나 빈도 자체는 절대적으로 높은 가운데, ‘아태’는 1990년대 중반부터 증가해 2018년을 정점으로 꺾이는 반면 ‘인태’는 2010년 이후 상승세다.

유럽과 중동에서 화염이 끊이지 않는 초유의 상황에 미국의 앞마당 인태마저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으로 불확실성이 고조되었다. 이제는 2주 뒤로 다가온 미 대선에서 카멀라 해리스와 도널드 트럼프 후보 중 누가 당선될지 예측하기보다 누가 되든 예측되는 것을 대비할 때다.

트럼프 당선 시 ‘인태경제프레임워크’(IPEF)의 폐기 가능성이 높게 점쳐진다. 이는 일본, 오스트레일리아(호주), 인도, 한국 등 미 동맹과 우방 14개국 간에 맺은 미국 인태 전략의 경제 버전이다. 공급망, 청정 경제, 공정 경제, 무역의 네 분야 중 미국이 사실상 제쳐둔 무역을 제외한 세 분야의 협정이 이달 발효되었다. 하지만 2017년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로 대통령 임기를 시작한 트럼프는 인태경제프레임워크를 ‘제2의 티피피’라며 당선 즉시 폐기를 공약한 터다. 더욱이 인태경제프레임워크는 폐기 시 의회 비준이 불필요한 행정협정이다.

트럼프의 탈퇴 공언은 인태경제프레임워크의 가벼운 존재감을 방증한다. 이는 이미 지구적 안보 위기와 미 대선으로 동력을 잃은 상태다. 하지만 트럼프가 인태 전략의 설계자였음을 고려할 때 그의 탈퇴는 인태 전략의 폐기가 아닌 전술의 변화일 뿐이다. 그렇다고 우리마저 이 협력체의 쓸모를 부정하긴 힘든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중국은 물론 우방 일본조차 상호의존성의 무기화를 휘둘러 곤욕을 치른 한국은 세계 최초의 인태경제프레임워크 공급망 협정을 적극 활용해야만 한다. 세계무역기구(WTO) 다자주의가 형해화된 오늘날, 한국은 공급망 협정과 같은 신흥 국제규범 제정 시 적극 참여해야 불이익이 적다. 냉혹한 각자도생의 시대에 국제미아가 되지 않기 위해선 이중 삼중의 집합적 보호막이 절실하다.

따라서 미국의 인태경제프레임워크 탈퇴와 무관하게 우리의 지역 전략은 궤도 수정이 시급하다. 우선 이를 반중 연대가 아닌 중견국 간 경제협력체로 명확히 자리매김해야 한다. 사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국이 이 협력체의 색채를 반중 연대로 칠하려 할 때마다 이를 말린 나라가 일본이며, 미국을 포함한 모든 참가국이 중국을 과도하게 자극할 만한 대만의 참가는 거부했다. 한국은 미국이 떠나도 여타 참여국과 함께 이를 역내 중견국 간 경제협력체로 재건축할 가치가 있다.

둘째, 이제라도 현 정부는 인태 전략이 전 정부의 신남방정책을 계승한 것임을 재천명해야 한다. 우리는 미국 전략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독자 정책과 공통분모를 지닌 전략에서 협력하는 모양새를 취해야 동아시아와 아태에서 우리의 자율적 전략 공간을 넓히게 된다. 그래야 미국이 빠진 인태경제프레임워크의 존속 의의도 생겨난다.

셋째, 우리를 인태라는 지정학적 공간에만 가둬선 안 된다. 윤석열 정부는 ‘글로벌 중추국가’ 구상에서 동아시아, 아태 등과의 협력도 제시했으나 실제로는 한·미·일 협력과 인태 전략에 올인하다시피 해 냉전 질서로의 퇴행을 자초했다. 모두가 무관심하나, 한·중·일 모두 가입한 동아시아의 유일한 경제협력체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은 다른 자유무역협정에는 없는 상설 지원기구(RSU)를 설치했다. 이에 유럽연합(EU)의 산파역을 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의 ‘고등기관’처럼 이를 투명하고 민주적인 지역 거버넌스로 키우려는 담대한 상상도 해보자. 유라시아에서는 유럽연합은 물론 러시아와도 대화하고, 중견국 연대 믹타(MIKTA·멕시코, 인도네시아, 한국, 튀르키예, 오스트레일리아의 협력체)에도 더 관심을 기울이자.

다행히 지구상에는 중견 제조혁신 강국 한국과 손잡으려는 나라가 적지 않다. 한반도에 전운이 감도는 절체절명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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