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전 남편 억울한 사형…고난 잊고 편히 쉬소서

한겨레 2024. 10. 21.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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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인혁당 피해자 송상진씨 부인 김진생씨를 추모하며
2004년 당시 서울시청(현 서울도서관) 앞에서 박정희기념관 건립 반대 시위를 하는 김진생. 이창훈 사료실장 제공

지난 3일 세상을 뜬 김진생은 1929년 2월27일 대구에서 났다. 이후 부모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생활하다 해방되던 해 귀국했다. 1950년 봄 어머니 친구분 소개로 송상진과 결혼해 2남1녀를 낳았다.

남편 송상진은 1928년 대구 팔공산 자락에서 태어나 대구사범을 나와 모교 공산초에서 7년 간 교사로 있는 등 대구 지역의 초·중 교사로 일했다. 이후 대구대 경제학과에 입학해 조교로 있던 도예종(24년생)과 청구대학 학생과장이었던 서도원(23년생)을 만나 친분을 쌓는다. 이 인연으로 1960년 사월혁명으로 이승만이 물러나자 셋은 대구·경북 지역 청년들을 모아 민주민족청년동맹(이하 민민청) 경북맹부를 결성하고 서도원은 위원장을, 도예종은 간사장을, 송상진은 사무국장을 맡았다.

민민청 경북맹부는 대구에서 통일촉진웅변대회와 남북학생회담 등 통일운동과 악법반대투쟁, 교원노조와 피학살유족회 등 사회단체 지원활동을 했다. 5·16쿠데타가 나자 더는 민민청 활동을 할 수 없게 되고 송상진은 ‘민민청 경북맹부 사건’으로 5개월간 투옥되었다. 1964년에는 1차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검거되어 3개월 투옥되었다. 두 사건에 연루되어 범법자로 낙인찍힌 송상진은 교사를 할 수도 없어 건축재료상을 시작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그가 선택한 직업은 양봉업이었다. 이로 인해 김진생은 고난의 시절을 보내야 했다. 2남1녀를 도맡아 키우면서 1951년 학원에 다니며 배운 삯바느질로 연명해야 했다.

1970년대 들어 김진생의 수고가 조금이나마 덜게 된다. 송상진의 양봉업도 자리를 잡고, 삯바느질도 솜씨가 좋다며 단골이 생겼다. 아이들도 중·고교생이 되어 손 갈 일도 줄었다. 다시 행복이 시작되는 듯했다.

이때 박정희는 3선 대통령을 넘보고 있었다. 야권과 재야에서는 영구집권을 꿈꾸는 박정희를 막아 세우려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한다. 대구·경북 지역에서도 대구경북협의회를 출범시킨다. 여기에 송상진도 운영위원으로 참여해 공명선거 감시단을 꾸리는 등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야권 단일후보 김대중은 박정희에게 지고 만다. 당시 엄청난 부정선거가 자행되었다. 예상대로 박정희는 1972년 10월 유신을 선포하더니 유신헌법을 제정해 종신집권 시나리오를 완성한다.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염원하던 사람들에게는 철퇴가 내려쳐진 셈이다. 결국 유신반대 운동이 거세게 불기 시작해 학생들은 1974년 4월3일 거사를 계획했다. 이를 기회로 박정희와 중앙정보부는 자신들의 정치적 반대세력을 쓸어버리려 했으며, 그 본보기로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조작했다.

남편이 구속되자, 김진생은 종교계 인사들과 정치인을 만나며 구명운동을 했다. 기회만 있으면 생업을 포기한 채 서울에 와 남편 무죄를 호소했다. 하지만 피어린 1년간의 구명운동도 남편을 살리지 못했다. 심지어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김진생과 사형수 부인들을 중정으로 끌고 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구명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받으려 했다.

인혁당사건 대책위가 꾸려지고 공동대표를 맡았던 문정현(앞줄 가운데) 신부와 함께 찍은 사진. 뒷줄 가운데가 고인이다. 이창훈 사료실장 제공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기 위해 서울에 온 김진생은 재판 다음날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는다. 남편을 비롯해 여덟명의 사형수가 사형을 당했다는 것이다. 정신없이 형무소를 찾았지만 시신을 바로 찾을 수 없었다. 다음날 다른 친인척 도움 없이 딸과 둘이서 시신을 수습해야 했다. 이후 구명운동을 함께 벌였던 함세웅 신부가 주임신부인 응암동 성당에서 위령 미사를 드리기 위해 이동하던 중 경찰들이 시신을 탈취해 벽제 화장터에서 강제화장을 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경찰 폭거를 저지하던 문정현 신부는 다리를 다쳐 평생 불구로 살았다. 장례식도 정상적으로 치를 수 없었다. 칠곡 현대공원에는 사형수 여덟명 중 도예종, 송상진, 하재완, 여정남 넷이 묻혔다. 묘비에는 ‘민사(민주인사 뜻) 송상진’이라 적었다.

남편을 잃은 김진생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자식들도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김진생은 다시 중정에 끌려가는 일이 생겼다. 남민전 깃발 ‘전선기’가 인혁당 사형수들 내의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내의를 어떻게 전달했는지 조사가 진행된 것이다. 그 조사과정에서 중정 요원들은 부인들에게 치욕스러운 짓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김진생의 삶에 서광이 비친 것은 1998년이다. 그해 ‘소위 인혁당 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공동대표 이돈명 문정현)가 출범하고, 또 유가협 회원들이 민주유공자법 제정촉구를 위한 422일간의 기나긴 국회 앞 천막농성을 시작했다. 이 농성에 김진생 등 대구 지역 인혁당 가족들도 참여했다. 농성자 중 고령이었던 김진생은 작은 체구에 똥그란 눈으로 열심히 구호를 외쳐 ‘토깽이할머니’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런 노력 덕에 2000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활동이 시작되어 인혁당재건위 사건 조작을 밝혔고 2005년에는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에서 다시 조작 사실을 밝혔다. 드디어 2007년 법원은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이때 김진생은 남편 무덤을 찾아 “얼마나 억울했을까, 그 지독한 죄를 씌우고…. 자식들 잘 컸고 이제 다 밝혀졌으니 편히 쉬소”라고 말했다.

세월이 흘러 2021년부터 국회 앞에서 23년 전의 ‘민주유공자법 제정투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하지만 토끼할머니는 함께할 수 없었다. 요양병원 신세를 지고 있어서다. 그러다 몸이 좋아져 집으로 돌아왔다는 소식도 들었는데 그만 황망히 가셨다.

남편을 억울하게 보내고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던 우리의 토끼할머니! 이제 영원한 세상에서 편히 머무소서.

이창훈/4·9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

1964년 4월 젊은 날의 김진생. 이창훈 사료실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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