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 이 여행] 뿌리 깊은 맛, 인삼을 찾아서
(시사저널=글 강은주·사진 신규철)
인삼엔 인생의 달콤쌉싸래한 맛이 배어 있다. 깊고 오묘한 인삼의 풍미를 제대로 느끼고 싶어서 강원도 홍천으로 떠났다.
신묘한 효험이 있는 풀 '신초', 땅의 기운이 모인 결정체 '토정', 사람이 받들어 모시는 존재 '인함'. 세 단어 모두 인간의 사지를 닮은 약초 인삼을 일컫는 표현이다. 한국에서는 오랜 세월 '심'이라는 고유어가 쓰였다. 과 등 의서에서도 인삼을 '심'으로 적었다. 그런가 하면 산삼을 캐러 산에 가는 일을 뜻하는 '심메', 산삼을 캐러 다니는 사람을 의미하는 '심마니'는 사전에 등재된 어엿한 표준어다. 한국인의 삶과 삼. 떼려야 뗄 수 없는 유구한 관계다.
홍천 인삼을 만나러 가는 길
한국 인삼을 고려인삼이라 한다. 세계적으로 우수성을 인정받아 온 고려인삼의 발상지 한반도는 예부터 인삼을 생육하기에 좋은 곳으로 이름 높았다. 한국 땅에서도 특출한 인삼 산지를 꼽으라면 어디일까. '특출'의 기준을 무엇으로 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으나 식물학적 완숙기에 해당하는 6년근 인삼의 주산지를 묻는다면, 답은 강원도 홍천이다. 강원 지역은 전국 최대 인삼 산지이며, 조선 시대 의관들이 가장 선호하던 '왕실 인삼'의 산지이기도 하다. '영조실록'에서도 강원 인삼의 약효를 칭송한 바 있다. 그중에서도 홍천은 도내 인삼 생산량의 30퍼센트가량을 차지하는 고장이다. 최상위 등급에 해당하는 천삼과 지삼의 생산율도 높다. 천삼은 말 그대로 하늘이 내린 삼이다. 매끈한 표면에 치밀한 조직을 지닌 상위 1퍼센트의 개체이며, 600그램 기준 600만 원을 호가할 정도로 귀하디귀하다. 지삼은 땅의 기운이 충천해 잘생긴 인삼을 가리킨다.
볕 좋은 아침, 내비게이션에 '강원도 홍천군 홍천읍 하오안리'를 입력했다. 목적지는 홍천군인삼경작인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는 최현상 대표의 '마부농원'이다. "'마부'라고 하니 말이 어디 있냐고들 하더라고요. 실은 마부작침, 즉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든다는 뜻의 사자성어에서 가져 온 상호예요. 인삼 농장을 운영하는 과정이 꼭 그렇거든요. 무엇보다 은근과 끈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아무렴, 약초 중의 약초를 기르는 것이 그리 만만치만은 않을 터였다.
푸른 차광지가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인삼밭에서 최 대표를 만났다. 음지식물인 인삼은 빛에 예민한 편이라 5월에서 8월까지 검은 차광막과 차광지를 함께 친다. 9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는 차광막을 벗겨 차광지만 씌운다고 했다. 차광지와 차광막은 생육 최적 온도 25도를 유지하고, 빗물이나 습설로 인한 병충해를 막는 필수 도구다. 가만히 인삼을 관찰하던 최 대표는 흙을 파내어 한창 여물고 있는 인삼 뿌리를 보여 주었다. "동물은 아프면 어떻게든 티가 나는데 식물은, 특히 인삼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면 아래 삼이 어떻게 자라는지 알 도리가 없죠. 그래서 이렇게 가끔 생장 상태를 확인합니다. 다행히 하얗고 단단한 삼이 자라는 중이네요." 강원 지역의 토양은 잔돌이 섞여 있어 뿌리가 잘 발달하는 것이 특징이다.
기다림의 미학, 인삼 재배
배추와 무 같은 작물은 땅에 심어 거두기까지 3개월가량 소요된다. 인삼은 어떨까. 무려 8년이 걸린다. 2년 동안 땅을 고르고 비옥하게 만든 뒤에 비로소 6년근 인삼을 숙성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땅은 못 속입니다. 인삼을 심기 전에 예정지를 선정하고 관리하는데, 이때 토양 관리가 작황의 50퍼센트 이상을 좌우합니다. 인삼이 수분을 적절히 흡수하면서 자라도록 유기물을 주입하고, 트랙터로 흙을 갈아 햇볕 아래 살균 소독을 해야 하는 이유죠. 우리가 건강한 생활을 위해 좋은 습관을 들이듯, 인삼도 본격적으로 재배하기 전에 흙을 잘 길들이는 게 중요합니다."
홍천 인삼의 특징 중 하나는 씨를 직접 뿌리지 않고 1년생 묘삼을 이식 재배한다는 데 있다. 사포닌 함량이 높은 잔뿌리를 잘 자라게 하기 위함이다. 묘삼을 45도 각도로 기울여 심고 나면 중력에 의해 뿌리가 양쪽으로 고르게 발달하고 모양과 품질이 월등해진다. 이처럼 지난한 인삼 재배 과정엔 철저한 안전성 검사도 따라붙는다. 토양 검사를 통과하면 4·5·6년근 인삼을 검수한다. 약 3300제곱미터(1000평)당 열 뿌리를 무작위로 골라 살피는 식이다. 인삼은 재배 기간에 비해 개체 크기가 작기에 안전성 검사를 보다 면밀하게 수행하는 편이다.
과연 인삼 농사와 인간사가 다르지 않다. "제게 두 아이가 있어요. 인삼은 셋째 아이 같은 존재예요. 인삼 농사를 갓 시작했을 때, 열 살 딸아이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는 해 수확할 거라 생각하니 애틋한 감정이 솟구치더라고요. 마침내 8년이 흐르고 인삼을 수확하던 순간을 여전히 잊지 못합니다. 트랙터가 지나간 자리에 뚝뚝 떨어지는 뽀얀 인삼을 보면서 얼마나 행복하던지요." 인삼, 사람, 누구에게든 사랑만큼 훌륭한 양분도 없을 테다.
인삼, 잘 고르고 잘 먹는 법
가을은 인삼이 월동 준비를 하기 위해 영양분을 뿌리로 내려보내는 시기다. 바꿔 말하면, 가장 많은 영양분이 뿌리에 머무는 수확의 적기라고도 할 수 있다. 최현상 대표의 마부농원은 9월 초 이미 수확을 시작해 10월에 본격적으로 결실을 거둔다. 지난여름 더위가 극심해 작황을 걱정했지만, 다행히 튼실하고 기다란 삼이 많이 나와 한시름 놓았다. 해마다 10월이면 홍천군에서는 지역 특산물인 인삼과 한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홍천 인삼한우 명품축제'를 열어 전국의 건강식품 애호가를 불러 모으기도 한다.
아침저녁으로 차가워진 공기에 기력이 쇠하는 때, 잘 여문 인삼 한 뿌리가 건강을 지켜 준다. 면역력은 증진하되 피로와 스트레스 증상은 완화하고, 각종 통증을 경감하며 간 기능을 개선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인삼은 항산화, 항노화에 주효하고 뇌 기능을 활성화한다. 약초의 왕 답다.
홍천 사람들은 수삼을 홍천 한우와 함께 구워 먹거나, 홍삼을 달여 즙으로 간편하게 섭취한다. 최근에는 음용하기 간편한 농축액 스틱도 다양한 맛과 형태로 출시된다. 홍천 명품인삼 향토산업 사업단은 브랜드 '홍천인'을 통해 첫 제품 '홍삼 담은 배도라지 스틱'을 선보였다. 홍천인은 질 좋은 인삼 가공 제품을 꾸준히 개발해 건강한 인삼 문화를 정착시키고자 한다. "많은 이의 건강을 지키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낍니다. 매일 아침 저를 인삼밭으로 데려다 놓는 건 책임감과 보람입니다." 최 대표가 인삼에 담는 진심이다.
Copyright © 시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