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열과 싸우는 도서관 [6411의 목소리]

한겨레 2024. 10. 21.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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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한 도서관 로비에서 진행된 ‘어쩌다 사과는 한개에 1만원이 되었을까?’ 전시 모습. ♣️H6s필자 제공

김주영 | 성북문화재단 도서관사업부장

“어쩌다 사과는 한개에 1만원이 되었을까?”
이 질문은 지난 3월 한 도서관 로비에서 진행된 주제 전시의 제목이다. 큰 부담 없이 사서 먹을 수 있었던 사과의 가격 상승 요인이 무엇인지 기후, 노동, 경제 등 다양한 관점에서 알아보자는 취지로 기획된 전시다. 그런데 민원이 제기됐다. 이 전시가 ‘정치적’이라 불편한 마음이 든다며 이용자가 사서에게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 시기, 사과 가격 상승과 관련한 논쟁들이 많았기 때문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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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공공도서관 현장에서는 특정 정치인, 세월호, 성교육, 성평등, 젠더, 페미니즘, ‘위안부’ 등을 소재로 한 도서에 관해 특정 단체가 도서관을 대상으로 금서 목록을 만들어 열람 제한이나 폐기를 요구하고 있다. 도서관 책임자나 책을 사들이는 담당 사서에게 법적 책임을 묻는 등 압력을 행사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또한 이러한 일들이 여러 매체를 통해 공론화되면서 개인 이용자들조차 예민하게 반응하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다.

도서관 현장의 사서들은 ‘국민의 알권리 보장’과 ‘지적 자유 수호’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두고 모든 이념적, 종교적, 정치적 갈등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도서관 및 사서직의 권리선언’에 입각해 자료를 수집하고 이용자들에게 제공해왔다. 그러나 최근에 발생하는 여러 일들로 사서들은 자료 선정과 관련한 전문가적 자존감 상실과 함께 법적 소송, 지속적인 민원에 대한 불안감이 가중되고 있다.

최근 발표된 김신영의 논문 ‘도서관 지적 자유 침해 양상과 대처 방안’에서도 도서관·사서의 자료 선정권 침해와 자기검열에 대한 압박, 자료 대출·열람 서비스 위축, 도서관 일상 업무 방해, 법적 소송에 대한 정신적 불안감 등이 도서관 현장의 애로사항으로 꼽혔다. 이러한 현장의 애로사항들로 인해 ‘국민의 알권리 보장’과 ‘지적 자유 수호’를 위한 도서관과 사서의 역할이 축소될까 도서관계에서는 우려가 크다.

많은 도서관 현장의 사서들은 외부 압력으로 인해 자신들이 소극적인 태도로 업무에 임하는 것을 경계하여 함께 서로 격려하며 지적 자유 수호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또한 장서 선정의 기준을 명확히 하고, 검열의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2021년 서울 성북구립도서관은 ‘아동 성추행’으로 실형을 받은 아무개 작가의 어린이책을 연구자와 성인에게만 열람할 수 있게 하는 열람 제한을 결정했다. 이 사건 이후 사서들은 검열과 관련하여 전문가와의 워크숍, 도서관 이용객과의 토론회를 통해 우리의 결정이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어떤 과정을 더 수반해야 하는지 등을 논의했다. 사서들과 구민들은 연대와 학문적 논의를 바탕으로 지적 자유와 검열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체적인 방안들을 모색하고 있다. 장서 개발 정책의 보완과, 관련 문제 발생 시 위원회 개최 등 실질적인 방안들을 함께 정했다. 이 과정은 구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한국도서관협회는 지난 8월 도서관의 지적 자유 보장을 위한 ‘도서관 지적 자유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이는 지난해 한국도서관협회가 ‘도서관에 대한 일체의 검열 반대와 지적 자유 수호를 위한 성명서’를 발표한 이후 도서관 현장에서 지적 자유를 침범하는 행위에 대해 실제적인 대응 방법을 담은 가이드라인이다.

그러나 지적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국내외 성명서나 윤리 선언 등은 법적 구속력이 없다. 알권리는 헌법에서 보장하는 기본권임에도 이를 수호하기 위해 애쓰는 현장과 사서들은 법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지적 자유를 지키기 위한 사서들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다양한 가치, 입장 등을 교류하고 표현하면서 서로 충돌하고 갈등이 고조되는 요즘, 지적 자유를 수호하는 공공도서관은 갈등의 현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갈등을 넘어설 수 있는 공론의 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공론장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사서들이 안심하고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법적, 제도적 보호 장치가 시급히 마련되기를 바란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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