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귀환에 대한 몇가지 생각[EDITOR's LETTER]

2024. 10. 21.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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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


탄소·수소·산소·질소, 이 네 종류의 원소로만 이뤄진 분자는 도파민입니다. 이 분비물이 책과 독서를 얘기할 때도 등장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2022년 무더웠던 여름날. 책을 손에서 놓은 지 몇 개월째. 그날도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습니다. 저녁을 먹고 가방을 가지러 사무실로 올라갔습니다. 시원했습니다. 에어컨의 힘. 집에 가기 싫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책을 집어들었습니다.

100페이지가량을 단숨에 읽어 내려갔습니다. 행복감이 느껴졌습니다. 새로운 지식이 전달되자 보상이라도 하듯 기쁨의 호르몬이 뇌에 살포되고 있다는 그 느낌. 나중에 알았습니다. 실제 그 시간 뇌에는 도파민이 왕창 분비됐다는 사실을. 그런 경험 때문일 겁니다.

‘독파민’이라는 새로운 용어에 거부감이 전혀 없습니다. 책을 보면 도파민이 분비된다는 말입니다. 몽테스키외는 이를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독서처럼 값싸고 영속적인 쾌락은 없다.”

그렇다고 오래전부터 책을 좋아한 것은 아닙니다. 기자들은 언론사 입사 시험을 준비할 때가 가장 똑똑하다고 합니다. 기자가 되면 책보다는 술과 가까워지며 뇌세포는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존경하는 컨설턴트들과 대화를 했습니다. 장소는 한 컨설턴트의 사무실. 인상적이었습니다. 책장에는 책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지요. 책 사이사이에는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습니다. 대화에서도 책은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책에서 필요한 케이스를 찾아내 차곡차곡 뇌에, 그리고 메모장에 저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할 때 활용했습니다.

컴퓨터 폴더에서 파일을 불러내듯 뇌에서 케이스를 불러냅니다. 이를 현실과 연결시켜 스파크가 튀는 지점에서 솔루션을 찾아냅니다. 직관이라는 솔루션이지요. 나폴레옹이 전장에 책을 들고 나간 것도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책은 솔루션의 원천이었습니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도 그랬습니다.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하버드도 아니고 미국이라는 나라도 아니고 내 어머니도 아니다. 내가 살던 마을의 작은 도서관이었다. 하버드 졸업장보다 소중한 것이 독서하는 습관이다.”

그는 현업에 있을 때 아무리 바빠도 1년에 두 번씩 일주일 동안 혼자 태평양 북서쪽의 삼나무 숲 어딘가에 있는 비밀 판잣집으로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가져간 책과 논문을 계속 읽고, 자신의 생각을 메모했습니다. ‘생각 주간’이라 불렀습니다. 빌 게이츠 상상력의 원천은 책이었습니다. 또 책과 연결된 단어는 생각이라는 것을 보여준 예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책을 가까이하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기사 외에는 쓰지 않던 글을 어디엔가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주제도 미술, 진화론, 행동경제학, 심리학, 마케팅, 전략론 등등등. 서서히 글에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이때가 어떤 상태였는지 지식생태학자인 유영만 한양대 교수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는 “책을 읽으면 지성의 폐활량이 증가하고 제대로 된 언어를 선택할 수 있는 언어의 해상도가 높아진다”고 했습니다.

해답을 찾다 멈추지 않고 계속 생각할 수 있는 ‘생각의 폐활량’이 커지고, 분명한 뜻의 용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읽는다는 것은 생각과 연결돼 있고, 생각하면 이를 글로 표현하게 되는 선순환 구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럼 읽지 않고 쓰기만 했던 시간은 어떤 시간이었을까요. 입력 없이 출력만 해대니 잉크가 나오지 않아 뿌옇게 프린트된 것 같은 글을 쓴 것은 아닐까 돌아보기도 했습니다. “입력 없이 출력도 없다.”

이번 주 한경비즈니스는 책의 귀환을 다뤘습니다. 몇 해 전부터 곳곳에서 동네서점이 생겨나고 독서모임이 만들어졌습니다. 최근 열린 도서전에는 젊은이들이 북적거렸습니다. 책 읽는 것을 ‘힙하다’고 느낀 젊은이들이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해 ‘텍스트힙(text hip)’이라는 표현이 유행했습니다. 세계적으로 K컬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배우려는 사람이 빠르게 증가하는 언어가 됐습니다. 그리고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그 정점을 찍었습니다.

이번 책의 귀환은 2012년 인문학의 유행으로 책 읽기 열풍이 불 때와는 다릅니다. 당시 스티브 잡스가 일으킨 인문학 열풍은 산업적 요구였습니다. 과학기술의 논리만으로는 더 이상 생산성이 높아질 수 없다는 인식 때문에 인문학을 불러냈습니다. 성공적이었습니다.

이번 책의 유행은 그 성공의 반작용 측면이 커 보입니다.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막강한 권력이 된 스마트폰과 동영상과 숏폼의 지배에 대한 반작용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구라는 문학의 본질에 다가가는 것 같아 더 반가운 일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외주의 역사였습니다. 개에게 사냥을, 소에게 농사를 맡겼습니다. 뇌가 수행해야 할 기억의 외주화는 문자와 책을 통해 이뤄졌습니다. 지금은 검색과 창작, 글쓰기는 물론 생각이라는 인간 고유영역도 인공지능에 맡기기 시작했습니다.

올가을 책이 돌아왔습니다. 일시적 유행이면 어떻습니까. 그 유행을 타고, 잠시 외주를 멈추고 책과 함께 나의 내면으로 들어가 보면 어떨까 합니다.

김용준 한경비즈니스 편집국장 juny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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