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음악가로서 지조 지킨 진정한 민족음악가… 남한 가족 향한 그리움·애절함 노래에 담아”
北 양강도예술단 가수 출신 박미화씨
30여 년전 사제 연 맺고 민요 등 배워
안 추천으로 광명성절 콩쿠르 출전도
비극적 현대사 속 ‘비운의 삶’ 안성현
동료교사 시에 곡 붙인 ‘부용산’ 대표곡
한국전쟁 때 北 올라갔다 월북자 낙인
父 안기옥씨 김일성과 이견으로 숙청
부침을 겪다 조선음악연구소장 맡아
민족음악 유산 수집·민요 발굴 등 힘써
‘해당화 붉은 꽃이라 곱네/ 해당화 붉은 꽃이라 곱네/ 호랑나비는 감돌아 돌고 /해당화 피어서 방긋이 웃네…’
북한 노동당 문화예술부 산하 양강도예술단의 가수(소프라노) 출신인 박씨는 양강도예술단에서 안성현에게 민요를 배운 유일한 제자다. 둘의 인연은 3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함경북도와 양강도 경계 지역에서 자란 박씨는 집안 배경과 형편이 변변치 않아 고교 졸업 후 인근 양강도의 한 임업사업소에서 일했다. 어느날 사업소 행사 중 노래할 때 그의 실력을 눈여겨본 당 간부에게 발탁돼 평양 음악대학 성악과에 들어갔다. 19살이던 1990년 때다. 하지만 대학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1년도 안 돼 관둔 후 양강도예술단원이 됐다. 막내였지만 가극 주역과 독창 가수를 꿰찼다. 그 당시 김일성 주석이 지켜보는 무대에도 올랐다. “김일성 주석이 해마다 7∼8월 백두산(자락) 삼지연으로 여름 휴가를 왔어요. 양강도예술단은 다른 공연도 하면서 주석에게 바치는 ‘1호 공연’을 1년 내내 준비한 후 삼지연에 가 공연했습니다. 저도 입단 첫해와 이듬해 무대에 섰어요.”
박씨는 이후 중요한 공연 일정을 깜박하는 큰 실수를 저질러 ‘사상 단련 교육’ 등을 받느라 2년여 공백기를 보냈다. 1994년 다시 돌아왔지만 단원들의 시기와 질투는 여전했다. 평양 음대나 예술대학 수석 졸업생 출신도 합창석에 서는데 제대로 음악을 배운 적 없고 대학도 안 나온 박씨가 독창을 도맡았기 때문이다. “제가 속이 상하고 힘들어할 때 ‘얘(미화)가 노래를 잘해서 그런 건데 왜 못살게 구냐’고 단원들을 나무라던 안성현 동지가 ‘국가에서 인정하면 너한테 누구도 시비를 걸지 못할 테니 콩쿠르(경연대회)에 나가보라’고 제안했습니다. 제가 ‘성악을 배우지도 않았고 자신이 없는데 어떻게 콩쿠르에 나가냐’고 거절했더니 ‘민족성악(민요)으로 나가면 된다’고 설득하셨어요.”
둘이 사제의 연을 맺게 된 순간이다.
◆“선생님은 지조 지킨 민족음악가였다”
박씨는 서양음악뿐 아니라 민요와 판소리, 가야금·꽹과리 연주 등 민족음악(국악)에도 정통한 안성현에게 1년간 집중 지도를 받으며 ‘2·16 예술상 개인 경연대회’를 준비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일(2월16일·광명성절)을 기념한 북한 최고 콩쿠르다.
“선생님이 남한 민요를 서도(평안도·황해도) 민요 창법으로 편곡해주셨어요. ‘노래에 감정이 안 담기면 아무리 목소리가 곱고 노래를 잘해도 생명이 없는 것이니 이야기하듯 불러야 한다’고 당부하셨습니다. 또 ‘민요의 생명은 장단이니 항상 장구채를 갖고 다니면서 손바닥이나 얼굴에 쳐보며 가락 연습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어요.”
그렇게 민요를 열심히 배운 박씨는 거뜬히 본선 준결선까지 통과했으나 감기 탓에 결선 문턱을 넘지 못했다. 그래도 “네까짓 게 무슨 콩쿠르 출전이냐”고 깔보던 동료들보다 훨씬 좋은 성적이었다. 이후 예술단 내에서 박씨를 비방하던 소리가 쏙 들어갔다.
안성현은 ‘비운의 천재 작곡가’로 불린다. 고조부 때부터 이어온 음악 명문가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음악을 접한 그는 1930년대 부친을 따라 함경남도 함흥으로 이주했다. 1940년 일본 유학길에 올라 도쿄 도호음악대학에서 성악과 작곡, 지휘를 익혔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돌아와 전남지역 고교와 대학에서 음악을 가르치며 작곡 활동을 했다. 그의 대표곡이자 가수 안치환이 1990년대 후반 다시 불러 유명해진 ‘부용산’은 1948년 목포공립항도여자중학교(현재 목포여고) 시절 동료 국어교사(시인) 박기동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다.
‘부용산 오리 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박기동은 벌교로 시집갔다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누이를 기리기 위해 이 시를 썼다. 부용산은 벌교에 있는 야산이다. 안성현이 그해 요절한 제자의 넋을 위로하는 마음까지 담아 완성한 노래 ‘부용산’은 서정적인 가사와 애잔한 곡조가 심금을 울리면서 널리 퍼져나갔다. 하지만 비극적인 현대사와 맞물려 얄궂은 운명을 맞았다. 좌우 이념 대립이 격화하면서 산으로 쫓겨간 빨치산들의 애창곡이 ‘부용산’이었다. 불안하고 외로운 처지를 달래는 데 그만한 노래가 없었던 모양이다. 설상가상으로 한국전쟁 발발 후 볼일이 있어 북한에 간 안성현이 월북자로 낙인찍혀 ‘부용산’은 부르면 큰일 나는 노래가 됐다.
◆안기옥 명인이 김일성 눈 밖에 나면서 함께 고초
박씨와 국립국악원의 북한민족음악 관련 자료 등에 따르면 안성현은 북한에서 ‘공훈예술가’(업적을 세운 예술가 중 ‘인민배우’, ‘공훈배우’ 다음가는 영예) 칭호를 받았지만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았다. 가야금 명인 정남희(1905∼1984), 전설적 무용수 최승희(1911∼1969) 등과 북한 예술 개척에 기여한 월북 무용가 중 한 명인 아버지가 김일성 눈 밖에 난 게 결정적 계기였다. 안기옥은 평양에서 활동하며 김일성과 북한 음악에 대해 논할 정도였던 ‘인민·공훈 배우’였다. 하지만 절친했던 최승희가 1967년 숙청될 당시 온 가족과 함께 양강도 혜산으로 쫓겨났다. 박씨는 “김일성이 ‘서도민요를 기본으로 민족음악을 발전시켰으면 좋겠다’고 하자 안기옥 선생이 ‘그러면 안 됩니다. 민족음악은 판소리와 남도 창법을 함께 발전시켜야 합니다’라고 고집하다 숙청됐다는 얘기가 있었다”고 전했다.
안성현에게도 불똥이 튀었다. 양강도예술단 건물 구석 방에서 지내며 직접 작사·작곡한 노래도 많이 지었지만 국가 심의를 통과하지 못했다.
70세가 훌쩍 넘은 1990년대 중반 김정일이 조선음악연구소 소장으로 임명한 후에야 다시 평양으로 가게 됐다. 박씨는 “1994년인가 선생님이 김정일 위원장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올렸더니 김 위원장이 친필 서한과 피아노 선물을 보내고 조선음악연구소 소장으로 임명했다”고 말했다.
안성현은 조선음악연구소에 있으면서 가야금 산조와 사물놀이, 장단 표기 개편을 비롯해 민족음악 유산 수집과 정리, 이론화 작업, 민요 발굴과 편곡 등에 힘쓰며 창작활동을 병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기간 자연스레 스승과 제자의 만남은 뜸해졌다. “마지막으로 선생님을 뵌 건 2004년 3월이에요. 평양 대동강구역 문수거리에 있는 댁(아파트)을 찾았는데 전기 사정 탓에 엘리베이터가 운행하지 않아 13층까지 걸어 올라가기도 했어요.”
당시 안성현의 건강은 몹시 안 좋았다. “추운 날씨에 난방이 안 되니 두툼한 옷과 장갑, 솜 신발 차림으로 계셨는데 많이 야위고 눈이 충혈돼 있었어요. 눈이 잘 안 보이고 귀도 안 들리는지 옆에서 ‘영감님 제자 미화가 왔다’고 크게 말한 뒤에야 알아보고 반겨주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안성현은 2년 후인 2006년 4월 세상과 작별했고, 현재 아버지와 함께 평양 대성산 애국열사릉에 안치돼 있다.
◆스승 고향 찾은 제자 “너무 죄송”
20년 가까이 양강도예술단 소속 가수로 활동한 박씨는 탈북한 지 10년이 훌쩍 지난 2020년에야 스승의 고향인 나주를 찾았다. 남한에 정착하려 휴대전화·화장품 공장 일과 식당 설거지, 쇼핑몰 청소 등을 전전하며 힘겹게 살던 중 나주시가 안성현 업적을 기리는 다양한 기념사업을 한다는 소식에 귀가 번쩍 뜨였다고. “선생님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받았고 남한에 온 지가 언제인데 선생님 태어난 곳도 가보지 못했다는 생각에 너무 죄송했어요. 나주로 내려가 생가터를 방문하니 막 눈물이 났습니다.” 박씨는 그해 나주시의 ‘안성현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 때 초청받아 ‘부용산’을 불렀다. 이후 가끔 나주를 방문한 그는 이달 초에도 나주공연예술제 개막식 공연인 ‘안성현 선생 헌정음악회’에 가서 관객들에게 ‘해당화’를 들려주었다.
그의 바람은 악화한 남북 관계가 호전돼 서로 교류하는 날을 빨리 보는 것이다. “지금 남북한 (대치) 상황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서로 자유롭게 왕래하고 우리 같은 문화예술인도 편안하게 어울려 공연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강은 선임기자 ke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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