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노벨 문학상의 너머

기자 2024. 10. 20.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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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밤 이후, 한강 작가의 벼락같은 노벨 문학상 수상의 열기가 아직 식지 않고 있다. 사실 우리에게나 벼락같은 소식이었지, 스웨덴에서는 이미 한강 작가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고 한다. 확실히 아시아 최초 여성 작가니, 대한민국 최초니 하는 수식어들은 대한민국의 공기를 마취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전제 없이 한강 작가의 수상을 축하드린다.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리 단순하지 않은 이 열기가 무엇인지도, 열기가 가라앉은 다음에 짚어볼 문제인 것 같다. 또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이 우리에게 무얼 묻고 있으며 노벨 문학상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는 문학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앞으로 숙고해야 할 과제다.

스웨덴 한림원은 선정 이유에서 한강 작가가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을 선보였다”고 밝혔다. 이 짧은 선정 이유 앞에서 우리는 여러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한림원이 어떤 맥락으로 말했든 우리는 우리의 트라우마를 떠올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성실한 소설 독자가 아니어서 감히 말하긴 어렵지만, 일단 <소년이 온다>는 1980년 5월18일 광주를 명징하게 가리키고 있고,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을 다루고 있다고 하니 더욱 그렇다. 작가에게 맨부커상의 영예를 안긴 <채식주의자>도 폭력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데, 이 고통스러운 짐을 지고 문학을 했다는 작가에게 잠시나마 경외의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끊이지 않는 폭력 앞에서 우리는 때때로 무력감에 빠지지만, 그럴 때마다 비틀거리며 우리 옆을 스쳐 걸어가는 존재가 있다면 아마 그게 문학일 것이다.

역사적 고통을 함께 앓는 문학

사실 폭력의 원인은 어디엔가 분명히 있기 마련이다. 이 폭력의 원인을 인간 본성에 두고 끝도 없는 기원을 찾아나서는 일은 허망한 지적 허영일 수도 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벌어지고 있는 폭력의 근원을 먼저 더듬어보는 일을 통해 형이상학적 차원으로 도약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맥락에서 한림원이 밝힌 한강 작가의 “역사적 트라우마”의 원인은 아주 가까운 데 있는 것이며, 그것은 분명 우리 모두의 것이다. 그런데 좋은 문학 작품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게 혹 그런 트라우마의 공동체는 아닐까. 그래서 좋은 문학 작품은 섣불리 처방전을 제시하지 않고 함께 앓음으로써 의도하지 않은 해방의 빛을 독자의 영혼에 조금 흘려 넣어준다.

그렇다면 우리가 갖고 있는 트라우마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한강 작가처럼 5·18과 4·3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한 연원을 알려면 조금 더 소급해 올라가야 할 것이다. 제3세계의 특징은 보통 세 가지로 압축된다. 식민지 경험, 내전, 군사독재. 그러고 보면 우리의 근대사는 이 세 가지를 아주 혹독하게 지나왔다. 피식민지 기간 일제의 수탈은 치명적이었으며, 내전은 아예 국제전으로 치렀는데 아직도 끝나지 않은 채 분단으로 고착됐다. 독재는 또 어떤가. 군인은 아니었지만 이승만의 독재가 있었고, 4·19혁명으로 얻은 1년을 빼고 다시 박정희의 18년과 전두환의 7년을 합치면 30년이 넘는 시간을 독재의 억압 속에서 산 셈이다.

그러한 우리의 역사가 특이한 것은 거기에 경제성장이 보태졌다는 점일 것이다. 이 경제성장으로 제3세계적 특징이 사라진 듯 보이지만, 우리의 내면에는 보이지 않는 내전(분단)의 트라우마가 여전하고 그것은 오늘도 반복되고 있다. 또 우리를 세계 무대로 밀어 올린 경제성장에는 생태계의 파괴와 기후변화라는 역풍이 도사리고 있었음도 사실이다. 이러한 경제성장을 토대로 해서 지금의 ‘문화적 융성’이 가능한 건 아닐까, 하고 물어보는 것은 그래서 괜한 트집 잡기가 아닌 것이다.

기후변화·경제불평등 직시해야

프랑스의 역사가 쥘 미슐레는 르네상스의 원인으로 “세계의 발견과 인간의 발견”을 꼽으면서 16세기의 “거대하고 정당한 팽창을 통해 콜럼버스”와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를 거친 “지상의 발견에서부터 천상의 발견”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미슐레의 판단과는 다르게 콜럼버스를 통한 세계의 발견은 전혀 정당하지 않았다. 그게 근대 식민지의 서막이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근대의 문화예술에는 어두운 얼굴이 숨겨져 있다. 반면에 우리의 문학은 그 어두운 얼굴을 직시하면서 풍성해질 수 있었다. 그런 우리 문학도 언제부터 경제성장에 빚지기 시작했으니 역사란 참으로 복잡 미묘하기만 하다.

아무튼 우리에게 여전히 제3세계적인 속성이 완강하다는 점은 분명한데, 거기에 덧붙여 ‘기후악당 국가’라는 제국적 속성과 그것의 필연적 결과이자 원인인 극심한 경제불평등 또한 엄존한다. 이 모든 것을 극복하는 게 문학의 과업이라고 하면 지나치겠지?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함께 앓으며 넘어서려는 언어가 ‘노벨 문학상의 너머’가 아닐까?

황규관 시인

황규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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