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413> 고운 최치원 영정을 보고 시 읊은 서산대사 휴정

조해훈 시인·고전인문학자 2024. 10. 2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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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호리병 속에서 나와(時自壺中出·시자호중출)/ 사람을 대하며 흰머리 슬퍼한다네.

조선 시대 성리학자 정시한(1625~1707)이 1686년 쓴 '산중일기(山中日記)'와 금산군수를 지낸 김도수(1699~1733)가 1727년 쓴 '남유기(南遊記)'에도 이 영정이 기록됐다.

운암영당의 최치원 영정은 사본으로, 이날 원본 영정이 전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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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학과 더불어 노니누나

- 身與鶴同歸·신여학동귀

가끔 호리병 속에서 나와(時自壺中出·시자호중출)/ 사람을 대하며 흰머리 슬퍼한다네.(向人悲白頭·향인비백두)/ 성품은 산을 따라 함께 고요하고(性隨山空寂·성수산공적)/ 몸은 학과 더불어 노니누나.(身與鶴同歸·신여학동귀)

위 시는 서산대사 휴정(休靜·1520~1604)의 ‘고운 영정을 보고’(崔孤雲圖·최고운도)로, 그의 문집 ‘청허당집(淸虛堂集)’ 권 2에 있다. 서산대사가 지리산 화개골의 사찰에 머물며 수행하던 1549년 ‘지리산쌍계사중창기’를 지었다. 이 무렵 위 시를 쓴 것으로 추정된다. 휴정은 최치원을 신선으로 인식한다. 흰머리·산·학은 신선 모습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영정을 보고 쓴 시라는 점에서 영정의 실제 형상을 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미술사학자 최순우는 “선생의 존영 제작은 고려 초기 선생을 문창후로 추봉한 무렵일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문창후 추봉 시기를 1023년 2월로 추정해 볼 때 서산대사가 본 영정은 500년가량 쌍계사에 봉안돼 있었다. 조선 시대 성리학자 정시한(1625~1707)이 1686년 쓴 ‘산중일기(山中日記)’와 금산군수를 지낸 김도수(1699~1733)가 1727년 쓴 ‘남유기(南遊記)’에도 이 영정이 기록됐다. 하지만 쌍계사에서 처음 조영된 이 영정은 1784년 전북 정읍 무성서원으로 옮겨져 봉안돼 오다 1968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된 후 행방을 모른다고 한다. 무성서원은 최치원이 당시 태산(泰山)이던 이 지역(현 泰仁·태인) 군수로 재임 중 쌓은 치적을 기려 세웠다. 쌍계사에서 2차 영정을 1793년 제작했다. 쌍계사에 봉안하다 1825년 경남 하동군 화개면 덕은리 금천사(琴川祠)로 옮겼다. 여기서 1868년 하동향교로 이안됐다가 1902년 하동군 횡천면 횡천영당으로 옮겨졌다. 1924년 하동군 양보면에 운암영당을 창건해 지금까지 봉안하고 있다. 현전하는 최치원 영정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파악된다.

지난 11일 오전 10시부터 운암영당에서 ‘하동 운암영당 창건 100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운암영당으로 최치원 선생 영정을 옮겨와 첫 제향을 지낸 지 100주년이 됐다. 운암영당의 최치원 영정은 사본으로, 이날 원본 영정이 전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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