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과 별개로 과학적 기반에서 현대 국어학 개척한 선구자”
‘이숭녕 현대국어학의 선구자’ 펴내
‘중세 조선어 모음체계’ 설정한
1940년 ‘아래 아(·) 음고’ 논문 등
국어학 분야 100여편 논문 남겨
스승 이어 음운론 전공 이병근 교수
“국어학 장편 논문 처음 쓰신 분”
‘이숭녕 현대국어학의 선구자’(태학사).
현대 국어학의 개척자로 불리는 심악 이숭녕(1908~1994) 선생 30주기를 맞아 국어학계 후학 74명이 쓴 책이다.
1300쪽이 넘는 이 책에는 이병근 서울대 국문학과 명예교수 등 제자 및 유족 29명의 회고담과 고인의 방대한 국어학 논저를 소개하고 평가하는 글이 담겼다.
일제 강점기 경성제국대에서 조선어학을 전공한 고인은 과학적 기반 위에서 국어학을 개척한 학자로 평가받는다. 그가 1940년 진단학보에 투고한 논문 ‘·(아래 아) 음고’는 3년 전 태학사에서 나온 ‘국어사 논문 걸작선’의 가장 앞자리를 차지했다.
“중세 조선어 모음 체계에서 현재는 없어진 ‘·(아래 아)’ 음가를 검토해 ‘아’와 ‘오’ 사이라고 밝히면서 중세 조선어 모음 체계를 설정한 논문입니다. 국어사에서 이만한 연구는 당시까지 없었어요. 이 연구로 현대적인 국어학 연구가 시작되었죠.”
지난 16일 전화로 만난 이병근 교수 설명이다. 그는 이 책에 이숭녕 학술 활동을 총괄하는 글을 실었다.
이숭녕은 국어학 중에도 음운론이 주전공이지만 조어(단어 형성), 어휘, 방언, 어학사 등 분야에서 100편이 넘는 논문을 남겼다. “선생님이 논문을 처음 쓸 때만 해도 한국어 주제의 현대식 논문이 없었어요. 대개 3, 4쪽 칼럼 형태 글이었죠. 선생님이 처음으로 본격적인 장편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죠. 새로운 국어학 분야를 스스로 개척하고 또 오구라 신페이 등 일본 학자들이 쓴 ‘모음조화 연구’ 같은 국어학 논문들을 수정하느라 저서를 쓸 겨를도 없으셨어요.”
1959년 서울대 국문학과에 들어가 스승 이숭녕을 만난 이병근 교수 역시 음운론·방언학 전공이다. 이숭녕 교수 추천으로 1980년대에 옛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시행한 전국 방언조사 사업을 기획하기도 했다. 독일 방언학 연구를 하며 1930년대 초 평안도 지방 방언 연구에 나선 이숭녕은 그 뒤 30여년 동안 한국 여러 지역의 방언을 채집해 기록(‘이숭녕의 방언채집 자료’)으로 남기기도 했다.
책의 회고담을 보면 이숭녕의 학부 ‘국어학 개설’ 수업 시간은 마치 생물 강의 같았단다. ‘(일반언어학의 기초를 위해) 발음 기관의 이름을 영어, 독일어, 불어로 다 불러 주시거나 적어 주셨는데 학생들 간에는 우리가 생물학과에 입학한 것이냐는 불만도 있었다.’(홍윤표 연세대 명예교수)
“국어학은 일반언어학이면서 개별언어학이다”는 생각이 확고했던 이숭녕은 제자들에게 일반언어학 공부와 이를 위한 외국어 공부를 유별나게 강조했다고 한다. 국문학과 학부 입시 면접 시험에서 독일어 단어 테스트를 할 정도였다고 이 교수는 전했다. “말도 못 할 정도로 외국어 학습을 강조했어요. 영어 독어 불어는 다 하고, 힘 있으면 희랍어 터키어 몽골어 만주어까지 하라고 하셨죠. 옛 문헌 독해를 위해 한문도 모르면 안 되고요.”
일제 시대 조선어 연구는 독립운동의 한 방편이기도 했다. 일제 탄압으로 많은 조선어 연구자들이 혹독한 옥고도 치렀다. 하지만 이숭녕은 조선어 연구에서 민족 문제와는 별도로 과학적인 언어 연구를 강조했다.
“주시경(1876~1914) 선생은 단일 언어와 단일 민족을 주장하며 언어를 통해 민족 독립을 이룬다고 하셨어요. 반면 이숭녕 선생은 경성제국대학에서 배운 프랑스 등 유럽의 새로운 언어이론에 기반해 언어는 민족과 별개로 그 체계나 구조를 독자적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봤어요. 그러니 자연스럽게 음운 연구로 출발하셨죠. 음운은 단위가 딱딱 떨어지니까요. 음운 한개 한개가 상관관계가 있어 그 관계를 묶어 전체를 바라보고 또 그중 하나가 변하면 혼자만 변하는 게 아니라 전체 속에서 같이 움직여 변한다고 봤죠. 이렇게 새로운 연구 방법론을 채택하니 앞에 연구한 사람들과 (연구 내용과 결과가) 달랐던 거죠.”
이 교수는 스승의 국어학 연구에는 고바야시 히데오(1902~83) 경성제국대 교수의 영향도 있었을 것으로 봤다. “고바야시 교수는 당시 최신 서양 구조주의 언어 이론에 해박했어요. 이숭녕 선생이 경성제대 예과 시절 이 분의 언어학 강의를 들었어요. 고바야시 교수는 일찍이 프랑스학파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책 ‘일반언어학 강의’를 번역했죠. 이 선생께서 언어학을 전공하겠다고 하니 고바야시 교수가 신경을 많이 써, 집까지 들러 프랑스어나 독일어로 된 언어학 책을 토론하고 가르쳤다고 들었습니다.”
인터뷰 끝에 국어학이 앞으로 가야할 길이 뭐냐고 묻자 이 교수는 이렇게 답했다. “제가 제안해 이숭녕 선생은 국내 최초로 정년퇴임 기념 강연(1973년 9월)을 하셨는데요. 거기서 이 선생님은 한국어를 대상으로 하는 한국적인 일반언어학 연구 방법론이 나와야 한다고 강조하셨어요.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독일의 역사 언어학이나 프랑스의 구조주의 언어학, 미국 노엄 촘스키 교수의 변형생성문법 이론이 세계 언어학계를 이끌었잖아요. 우리도 나름대로의 연구 방법론이 나와 세계적으로 한국어 연구 학파가 형성되면 좋겠습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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