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림 부산시절이 ‘화양연화’…자갈치·도심 풍물 묘사 압권

조광수 나림연구회 회장·전 한국아나키즘학회 회장 2024. 10. 20.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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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문학과 인문 클래식 <16> 이병주의 부산 예찬송 ‘예낭 풍물지’

- 바다와 언론인 보람 만끽한 시간
- 6년 머문 부산을 고향으로 여겨

- ‘내일 없는 그날’ ‘배신의 강’ 등
- 부산지역 배경인 소설 작품 다수
- 그 중 ‘예낭 풍물지’ 가장 애착

- 어물전 물고기 사열 기막힌 비유
- 나림다운 권력 비판·풍자도 탁월

나림 이병주는 부산 시절이 화양연화였다. “내 인생 가운데 이 시기를 가장 아름답게 회상하는 버릇이 있다”고 회고했다. 부산은 나림이 언론인으로서 보람과 영광 그리고 수인(囚人)으로서 치욕을 모두 겪은 곳이다. 만일 필화가 없었더라면 언론을 본업으로 하고 창작을 부업으로 하는 삶을 부산에서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림이 즐겨하는 표현대로 운명과 섭리는 천재의 가능을 엄하고 험하게 시험한다.

부산 바다에도 깊은 가을이 찾아든 지난 19일 부산 중구 자갈치시장 풍경이다. 나림 이병주 작가는 길지 않은 소설 ‘예낭풍물지’에서 자갈치시장을 담담하면서도 절절한 마음으로 그렸다. 이 소설은 1984년 드라마로 만들어져 ‘TV문학관’에서 방영됐다.


▮나림 연대기와 부산

나림의 연대기를 공간을 따라 정리하면 이렇다. 지리산 자락 하동 진주-일본 교토와 도쿄-중국 쑤저우와 상하이-서울-하동 진주 해인사 거쳐 마산-부산-서대문과 부산 형무소-서울-뉴욕-서울. 쉰 이후엔 넉넉하고 잦은 해외여행. 종횡무진하며 곡절도 심히 겪었고 주유천하 하며 발자취도 많이 남긴 일생이다. 그 많은 공간 중 나림은 특히 부산을 사랑했고 편안해했다.

세상엔 칸트처럼 평생 태어난 쾨니히스베르크 한 곳에서 교육받고 직장생활 하다 거기서 장수의 생을 마감한 사람도 있는가 하면 헤밍웨이처럼 미국 유럽 아프리카 카리브해를 세상 좁다고 여기며 종횡사해(縱橫四海)하다 스스로 삶을 마무리한 사람도 있다. 나림의 부산 정주(定住) 기간은 6년이지만 고향이라 불렀다. 고향은 마음속의 정처(定處)다.

나림이 부산을 그토록 좋아했던 이유는 첫 번째, 바다 때문이다. 바다는 자정작용이 있다. 정화작용을 하는 바다가 있다는 안심 덕에 구원을 느끼는 것이다. 나림이 부산을 사랑한 또 다른 이유는 언론인으로서 보람과 자부심을 만끽한 시간과 공간이기 때문이다. 교수 이병주는 녹슬지 않은 철학을 하려면 몇 해쯤 저널리즘의 바람을 쏘이고 저널리즘의 바람에 바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저널리즘의 견식으로 아카데미즘의 사상을 조명해 본다는 의도가 강렬했다. 국제신보(현재 국제신문) 편집국장 겸 주필 이병주는 저널리즘의 역동성과 박진감을 양껏 발산했다. 나림은 사숙했던 에세이스트 루쉰처럼 기막힌 잡감문(雜感文)을 수없이 썼고, 부산 독자들은 애독했다.

▮“가장 애착 느끼는 작품”

경남 하동군 이병주문학관에 전시된 ‘예낭풍물지’ 영문판. 국제신문 DB


나림의 작품 중 부산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 많다. 부산일보에 연재한 ‘내일 없는 그날’을 시작으로, 경남매일에 연재했던 ‘돌아보지 말라’는 마산과 부산을 오가며 진행되는 이야기이고, 다시 부산일보에 연재했던 ‘배신의 강’도 부산에 애착한 이야기이다. 단편 ‘칸나·X·타나토스’는 대교동 국제신보 편집국을 배경으로 1959년 7월 31일 하루 동안 일어난 두 가지 극적인 이야기다. ‘예낭 풍물지’는 1972년에 쓴 부산 예찬론이다. 나림은 한 인터뷰에서 “가장 애착을 느끼는 작품이 ‘예낭 풍물지’다”고 했다. 1968년 즈음의 부산이 배경이다.

상전벽해가 된 지금 56년 전 부산 모습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1945년 부산 인구는 30만 명 전후였다. 1949년 47만으로 늘어난 인구는 6·25 전란 기간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고 피란민이 모여들면서 1951년에 84만 명으로 급증한다. ‘예낭 풍물지’ 시대엔 150만 명, 이 작품을 쓰던 때는 200만 명에 육박했다. 뻥튀기만 되고 아직 정비 정돈되지 않은 모습의 도시다. ‘예낭 풍물지’를 따라 1960년대 말 부산의 풍물을 감상하는 것도 한 즐거움이다.

주인공 안은 살아있다는 의식과 곧 기적이 나타날 것 같은 기대로 거리를 배회한다. 기적이란 자신의 영어(囹圄) 중 떠나버린 옛날 마누라를 꼭 한 번이라도 만났으면 하는 기대다. 감옥살이 3년째 현미의 노래 ‘검은 상처의 블루스’가 끈적끈적하게 울리던 즈음 “저를 용서하옵소서”를 3번이나 쓴 편지를 받았으나 도대체 어디로 답장을 써야 할지 몰라 그땐 하지 못했던 말 “오히려 용서를 빌 사람은 나”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 체력이 용서하는 한 게으름 없이 거리를 헤매는 것이다.

안은 유족회 사건으로 10년 형을 받았으나 중증 폐병으로 5년 만에 풀려난 폐인이다. 유족회 사건이란 6·25 때 비명에 죽은 사람들의 유골 찾기 운동을 하던 유족 188명이 5·16 직후 강제 연행돼 불법 구금됐다가 소급입법으로 처벌된 ‘피학살자 유족회 사건’을 말한다. 세상이 아무리 험악해도 비명에 간 부모 형제의 유골이나마 수습하겠다는 소박한 소망을 불온하게 여겨 벌준 것은 폭력이다. 안의 겸손한 해명이다. “처음엔 단순히 유골 찾아 매장하자는 동기로 시작했으나 하다 보니 배상금 장례비 사과요구까지 과격한 운동으로 번졌다. 조직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움직임을 막으려다 더 조직 속으로 빠져들어 결국 다수 의사에 복종하지 않으면 애초 조직을 파괴하려 들어온 제5열 취급받게 된 상황이었다.”

▮어머니 그리고 자갈치

안은 가끔 모친이 포장 치고 장사하는 자갈치시장에 들른다. 모친의 성화로 건너편 음식점에서 생선 간과 생선국을 먹고는 해변에 즐비한 생선가게를 장군이 졸병 사열하듯 한 바퀴 돈다. “상어는 그 사나운 꼴이 아무리 잘 봐주려 해도 시카고의 갱을 닮았고, 날씬한 꽁치는 영국 왕실의 근위병, 배가 불룩한 복어는 중국인 브로커, 전어는 그 민첩한 스타일이 일본 상인과 비슷하고. 사팔뜨기가 매력이라고 역설하는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은 건 도다리, 낙지는 크나 작으나 제정 러시아 말기의 테러리스트.” 비유가 기막히다. 압권은 그 누누한 물고기 시체를 봐도 육지 동물 사체를 보고 느끼는 연민과 비참함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이다. 답은 물고기의 눈에 있다. 셀룰로이드 바른 것 같은 생선 눈엔 감정이나 호소력이 없다. “물고기의 눈은 생명력 있는 것에 대한 우리의 공감을 감쇄한다”는 나림의 관찰에 공감이 간다.

물고기 사열을 마치면 기적을 바라는 심정으로 도심을 배회한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지치면 다방에 들러 쉰다. 당시 부산 원도심 중구의 인구는 부산의 10%였으나 전체 다방의 50%가 밀집해 있었다. 감옥에서 들었던 ‘검은 상처의 블루스’가 흘러나온다. 실 오스틴의 구성진 색소폰 연주곡 ‘broken promises’에 전혜린의 시 “그대 나를 버리고 어느 님의 품에 갔나. 가슴의 상처 잊을 길 없네. 사라진 아름다운 사랑의 그림자…”를 가사로 붙인 노래다. 여러 가수가 불렀지만, 현미의 음색이 단연 일품이다.

소설에선 나림다운 권력 비판과 풍자도 빠지지 않는다. 안의 친구 권철기는 쓰고 싶은 내용을 쓰지 못하는 기자 노릇 하느니 소설가가 돼 호색문학이나마 양껏 써보겠다고 호언한다. 헨리 밀러의 에로티시즘을 빌려 “태평양 깊숙한 곳에서 10피트 길이의 페니스를 가진 수컷이 산덩어리만한 암컷 고래와 교미하는 옆에서 오징어 새우 도미가 덩실덩실 춤추는 장대한 장면”을 상상하는 대목은 문자 그대로 상상을 절한다.

‘예낭 풍물지’는 사모곡(思母曲)이다. 일흔 노인은 회광반조(回光返照)하지만 임종하는 아들 옆 여인이 집 나간 며느리인지 손님으로 온 윤 씨인지 구분하지 못한다. 다만 손을 잡고 “돌아왔으면 됐다. 내가 너무 했다. 나는 안심하고 죽을 수 있다”고 유언한다. 젊어서는 사상 운동하는 남편 옥바라지하느라 힘들었고, 아들 덕분에 10년 3대가 행복하나 했더니, 늘그막엔 아들이 뒤늦게 행방불명된 부친 유골 찾는 운동하다 중형을 받고 몹쓸 병이 들어 폐인이 되었으니, 참 기구한 일생이다. 그래도 “너 죽는 날 나도 죽는다”며 풍비박산 난 아들의 재기를 끝까지 격려한다. 비 오나 눈 오나 동트기 전 어판장으로 나간다. 억센 생명력의 ‘자갈치 아지매’다. 어머니의 억척스럽고 굳센 생애는 그렇게 마감하지만, 상처투성이일망정 아들은 그 어머니 덕에 갱생의 기회를 얻는다. 어머니의 죽음은 종언의 서곡이다.

▮나림·부산·예낭

작가에겐 고향이 없다. 고향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성숙한 지성이란 말이 있다. 하지만 세계 명작은 대체로 향토문학이다. 도스토옙스키에게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생략할 수는 없다. 고향을 향수로만 감미롭게 느끼든, 발 닿는 모든 곳을 고향으로 삼든, 느끼고 깨달으면 바로 거기 고향이 있는 것이고 무심코 못 느끼면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고향은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다. 예낭에 대한 감상도 그런 맥락이다. 나림에게 부산은 예낭처럼 실제 이상의 실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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