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강제로 불임수술을”…상상 못할 끔찍한 폭력이 벌어진 이곳 [Books]

송경은 기자(kyungeun@mk.co.kr) 2024. 10. 20. 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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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50년 전 한국에선 불임수술을 국가가 강제할 수 있었다.

1973년 모자보건법이 처음 발효됐을 당시 제9조 시행령에 따르면, 특정 유전병이 있는 경우 의사는 보건사회부장관에게 불임수술 대상자의 발견을 보고해야 하고, 보건사회부장관은 그 환자에게 불임수술을 받도록 명령할 수 있으며, 그 명령을 통해 불임수술을 강제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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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열린 ‘임신중지 비범죄화 후속 보건의료 체계 구축과 권리보장 입법 촉구’ 법조계·의료계·시민사회 공동 기자간담회에서 고경심 산부인과 전문의가 발언하고 있다. 위 사진은 본 기사와 직접적 관련 없음.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불과 50년 전 한국에선 불임수술을 국가가 강제할 수 있었다. 1973년 모자보건법이 처음 발효됐을 당시 제9조 시행령에 따르면, 특정 유전병이 있는 경우 의사는 보건사회부장관에게 불임수술 대상자의 발견을 보고해야 하고, 보건사회부장관은 그 환자에게 불임수술을 받도록 명령할 수 있으며, 그 명령을 통해 불임수술을 강제해야 했다. 2년 뒤인 1975년 충남 보령의 정신병원 정심원은 수용 중인 정신박약·간질 환자였던 여성 12명을 불임수술 대상자라고 정부에 보고했고, 이중 9명이 유전성 정신질환임을 확인됐다.

이 사실이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지자 서울 대형병원 정신과 병동에서는 환자들이 자해를 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인권 단체들의 거센 비판의 목소리가 빗발쳤다. 그러나 사회적 합의는 쉽사리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정경균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정신박약 환자와 그 자식은 모두 불행하며 결국 사회악을 낳기 때문에 유전성 정신박약 환자에 대한 불임수술은 오히려 인도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환자의 자율권과 인권에 대한 고려는 없었다. 유전적으로 적격과 부적격을 나누는 ‘우생학’의 그림자다.

신간 ‘우리 안의 우생학’은 한국 사회가 걸어온 역사 속에서 발견된 ‘사이비 과학’ 우생학의 흔적을 과학사, 의학사, 장애사, 젠더 연구의 관점에서 파헤친 책이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민족의 생존을 위한 도구로서 우생학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살펴보는 것을 시작으로 우생학이 산아 제한을 통해 페미니즘과 연결된 과정, 한국의 가족계획사업, 산전 진단기술이 만들어낸 우생학적 공포, 우생학의 피해를 입은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펼친다. 저자들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강조한다.

정심원 논란 이후 20여 년 지난 1997년 사회적 약자에 대한 강제불임수술 문제가 세계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 여파로 한국의 모자보건법에도 다시 화살이 쏠렸다. 결국 정부는 1999년 2월 모자보건법을 개정하며 부랴부랴 해당 조항을 삭제했다. 하지만 아직 법이 개정되지 않았던 국회의 조사를 받은 6개 시설에서만 1983~1998년 총 66명의 정신지체 장애인에게 강제불임수술이 행해진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다. 실제 강행된 숫자는 이보다 더 클 것이 분명하다.

여전히 한국의 모자보건법은 ‘건전한 자녀의 출산’이라는, 다분히 우생학적인 목적을 함축하고 있다는 게 저자들의 지적이다. 모자보건법 제8조에 따르면, 모체의 건강이 위험할 경우 외에 본인 또는 배우자가 유전학적 정신장애 및 신체질환, 전염성 질환, 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한 임신,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및 인척 간에 임신된 경우에도 임신중절수술을 할 수 있다. 즉, 장애 태아의 낙태를 정당화하고 있는 셈이다. 장애운동단체들의 폐지 요구에도 이 조항은 아직까지 존속되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현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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