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발행어음]① 모험자본 공급하라고 규제 풀어줬더니… 엉뚱한 데 돈 쓴 증권사들

문수빈 기자 2024. 10. 20.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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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기업 투자 대가로 새 사업 허용했지만
과실만 챙기고 당국 원하는 투자는 외면
“제도 활용해 단기 고수익 올리는 데 열중”

국내 대형 증권사는 크게 ‘종합투자금융회사(종투사)’와 ‘종투사이면서 초대형 투자은행(IB)’인 회사로 나뉜다. 종투사는 증권사가 자기자본의 2배까지 기업에 대출해 줄 수 있고 초대형 IB는 여기에 어음까지 발행할 수 있다. 종투사 시스템이 도입된 지 10년이 넘은 가운데 김병환 금융위원장은 최근 이 제도를 손보겠다고 밝혔다. 성장성이 있는 기업을 적극적으로 발굴해 자본을 공급하라는 게 애초 도입 취지였는데, 증권사들이 편안히 앉아서 부동산 대출 등으로 과실만 취하고 있다고 판단해서다. 취임한 지 석 달이 안 된 새내기 금융위원장이 지적한 이 제도, 그중에서도 규제가 대폭 완화된 초대형 IB 사업자들의 실상을 짚어봤다. [편집자 주]

김병환 금융위원장이 취임한 지 한 달 만인 올해 8월 29일 서울 여의도 금융투자협회에서 열린 증권업권 간담회에서 증권사 10곳의 최고경영자(CEO)를 만나 발언하고 있다./금융위원회

“증권사의 외형은 상당부분 성장했지만 모험자본 공급이 미미하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지난 8월 김병환 금융위원장이 취임 후 10개 증권사 최고경영자(CEO)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이같이 말할 정도로 현재 금융위원회는 종합금융투자사업자(종투사) 제도가 그 취지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11년 전 시작된 종투사 제도는 은행과 벤처캐피탈(VC)의 역할을 증권사에도 부여한 게 골자다. 과거처럼 은행·VC 중심의 자금 공급만으로는 성장 잠재력이 큰 혁신형 기업에 대한 자금 공급에 한계가 있으니 시장 전문성이 있는 증권사도 자금 순환에 일조하라는 뜻이었다.

금융위는 증권사의 대규모 자금 조달 능력을 뒷받침해 주기 위해 규제를 완화해줬다. 하지만 종투사 인가를 획득한 증권사들은 혁신 기업에 투자하기보다는 저리(低利)로 자금을 조달해 상대적으로 안전한 대기업 또는 중견기업이나 부동산 투자에 집중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63빌딩에서 바라본 여의도 증권가./뉴스1

20일 금융감독원이 강훈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실(국회 정무위원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발행어음 사업을 하는 초대형 IB(미래에셋·한국투자·NH투자·KB증권)가 발행어음으로 자금을 조달해 투자한 채무증권과 지분증권은 올해 6월 말 기준 1996건(잔액 38조22억원·6월말 기준)인데, 이 중 비우량 신용등급(BBB+, BBB)에 대한 투자는 4건(1094억원)에 불과했다. 40조원에 육박하는 발행어음 잔액 중 극히 일부만 성장성있는 기업에 투입된 것이다.

지난 2022년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그해 말 기준 9개 종투사의 자산(466조원) 중 모험자본 공급과 관련 있는 주식은 9조8000억원, 전체의 2.1%에 불과했는데 이런 현실이 지금까지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법만 놓고 보면 증권사들은 굳이 위험한 곳에 투자할 이유는 없다. 자본시장법에 따르면 증권사는 발행어음으로 자금을 조달해 50% 이상을 기업금융관련 자산(대출채권, 어음, 증권 등)에 써야 한다. 대기업에 투자하든 중소기업에 투자하든 상관없이 모두 기업금융관련 자산으로 묶인다. 즉 모험자본이라고 할 수 있는 중소기업 투자는 집행하지 않아도 되는 제도적 구멍이 있는 것이다.

그래픽=손민균

이 때문에 금융당국이 국내 증권사들이 외형을 키울 수 있도록 도왔을 뿐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선임 연구위원은 “종투사 제도를 정량적 측면에서 평가하면 금융당국이 종투사에 기대했던 사업 차별화와 모험자본 공급 확대라는 목표는 달성했다고 보기 어렵다”면서 “제도의 혜택을 활용해 국내 종투사들은 단기 고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사업에 집중했다”고 진단했다.

앞서 2013년 금융위는 신성장 산업을 발굴하는 IB를 키우기 위한 목적으로 종투사 제도를 도입했다. 자기자본이 3조원 이상인 증권사에 기업 대출(기업신용공여)을 허용해 줬다. 2016년에는 자금을 비싸게 조달해야 하는 종투사가 모험자본을 공급하기에 제약이 있다는 목소리가 커지자, 다시 자기자본 4조원 이상의 증권사를 초대형 IB로 지정하고 만기 1년 이내의 어음을 발행할 수 있게 했다.

기존에 증권사는 환매조건부채권(RP)과 주가연계증권(ELS)을 통해 자금을 조달했다. RP는 만기가 대부분 일주일 이내로 짧고, ELS는 헤지 자산을 갖고 있어야 해 자금 활용도가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종투사 제도가 개선되면서 어음을 발행할 수 있게 된 건 초대형 IB엔 몸집을 키울 기회였다.

당시 금융위는 제도 개선의 배경에 대해 “은행이 과감하게 대출하지 못하는 혁신형 기업과 대규모 프로젝트에 자본을 공급해 기업이 활용할 수 있는 금융 서비스의 다양성을 제고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 현대아파트 단지의 모습./뉴스1

모험자본 공급을 등한시했던 초대형IB들이 집중하고 있는 사업은 부동산 투자다. 지난 6월 말 기준 4개 증권사가 발행어음을 조달해 투자한 자산 중 부동산 관련 자산은 4조88억원 규모다. 업계에선 실제 부동산 관련 자산 규모는 이보다 더 클 것이라고 예상한다.

부동산 투자를 늘리기 위해 ‘꼼수’까지 동원하는 증권사가 많기 때문이다. 규정상 발행어음으로 조달한 자금은 30%까지만 부동산 관련 자산에 투자할 수 있다. 그러나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을 위해 조성된 특수목적회사(SPC)에 대한 지분 투자는 부동산 투자가 아닌 기업금융관련 자산으로 분류되기에 이를 활용하고 있다.

강훈식 의원은 “금융당국이 증권사에 어음 발행을 허용했던 취지가 퇴색되고 있어 현황 점검의 필요성이 더욱 더 커지고 있다”며 “제도적 미비점을 보완해 발행어음이 자금의 선순환 구조를 구축하도록 개선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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