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일상을 살아내는 비범한 용기 [소소칼럼]
내가 아닌 한강 작가가 그 꿈을 이룬 지금, 마치 내 꿈을 대신 이뤄준 것처럼 벅찬 감동이 느껴졌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런 철없는 꿈조차 꾸지 않게 된, 공상마저 허락하지 않는 메마른 내 모습에 조금은 씁쓸해졌다.
‘평범 속에 비범함이 있다.’
어릴 적부터 이 말이 참 좋았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아버지는 평범한 자신을 끌어안고 그저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내는 이가 결국 비범해질 수 있다고 말씀하셨던 것 같다. 내가 가진 유일한 재능은 엉덩이가 무겁다는 것인데, 산업화의 역군이라도 되는 양 근면을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지낸 날들을 돌이켜보면, 이런 삶의 태도가 단단히 인이 박인 것 아닌가 싶다.
그 이후로 나는 변변찮은 일상이 못마땅할 때마다, 혹은 더 비범해 보이는 누군가를 부러워할 때마다, 그 스치는 마음에 질세라 이 말을 되뇌었다. 별 볼 일 없는 날들이 모여 특별한 날을 가져다줄 것이라 믿으며. 요행을 바라지 말고 비겁해지지 말자, 흔들리는 마음의 파도를 잠재웠다. 노력한 것보다 더 바라는 것은 도둑놈 심보라며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그러나 노벨상 수상자가 되었든, 흑백요리사의 거장들이 되었든, 새로운 셀러브리티들이 등장할 때마다 잠잠하던 내 마음은 눈치 없이 들끓는다. 소설과 생명을 맞바꾸었다는 한강 작가의 ‘추운 9년’은 가늠할 길 없고, 주방과 집만 오가며 보냈다는 흑백요리사 우승자의 10년 노력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글을 쓸 때는 아무것도 하지 못해 ‘글쓰기 외의 모든 것을 괄호 속에 넣고 한 단어씩 써간다(한강의 〈기억의 바깥〉 중)’는 작가의 겨울을 겪어보지 못한 나는, 그녀의 봄과 빛을 발한 찰나만 바라보며 동경을 품는다.
내가 좋아하는 건 밤하늘의 별이 아니라, 헛된 가치에 눈 돌리지 않고 묵묵히 자기 삶을 살아가다 꽃을 피운 들풀 같은 이들이다. 기자로 일하면서도 돈이나 권력에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사람들보다는, 하루 종일 골방에서 초파리를 들여다보며 “귀엽지 않나요?”라고 묻던 생명연구원의 어느 박사님이 더 멋져 보였으니까.
자기 자리에서 오롯이 제 몫을 다하는 것을 미덕으로 알아 온 나는 고지식했다. 어쩌면 욕망에 솔직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인생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남들이 맹목적으로 좋다는 걸 따르느라, 순간의 화려함을 좇느라 쉬운 길을 선택하는 것은 아닌지. 내게 맞는 옷이 무엇이고, 내가 진정으로 가고자 하는 방향이 어디인지.
빡빡한 자기 검열이 피곤하게 느껴질 때면 종종 우스갯소리로 ‘부모님은 나를 부자처럼 키우셨다’라고 자조했다. 현실적인 쓸모를 고민하지 않고 쓸데없는 일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주셨으니까.
하지만 막상 그런 ‘부자의 마음’을 가지고 선택을 해놓고도 아무도 그 쓸모를 알아주지 않으면 내심 풀이 죽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에 연연하지 않으려 마음속 불꽃을 활활 지피다가도, 때로 그 불씨가 사그라지면 더 쉬운 선택을 한 이들을 쳐다볼 필요 없다며 부러움을 애써 감췄다.
어쩌면 ‘평범 속의 비범’이란 말을 붙들고 살아온 것은, 역설적으로 평범함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욕심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나 싶다.
흑백요리사를 보며 인생 요리를 고민했을 때 ‘김밥’이 떠오른 것도, 평범하고 무난하다는 약간의 콤플렉스, 그렇지만 당근도 시금치도 고기도 버섯도 열심히 볶느라 매일 바쁘기 그지없는 나에 대한 연민 때문에 나왔는지 모른다.
내가 특별한 만큼 남도 특별하고, 남이 평범한 만큼 나도 평범하다. 그리고 그 평범함에 서사를 입혀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 각자가 짊어진 몫이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하루가 녹록지 않고 이따금 일상의 무게가 버겁게 느껴져도, 모두가 힘겨운 전투를 치르며 자신만의 서사를 써 내려가고 있음을 되새긴다.
그렇게 그저 그런 오늘을 덤덤하게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소소칼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소소한 취향을 이야기하는 가벼운 글입니다. 소박하고 다정한 감정이 우리에게서 소실되지 않도록, 마음이 끌리는 작은 일을 기억하면서 기자들이 돌아가며 씁니다.
김윤진 기자 truth3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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