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이후 미국 독점 패권이 ‘유라시아 반미 연대’ 키워

정의길 기자 2024. 10. 19.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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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지정학의 풍경
지정학의 역설적 귀환
2차대전 뒤 금기시된 유사 학문
러·중 세력권 무시가 부메랑으로
이란·북한·글로벌사우스도 가세
우크라·중동 전쟁이 새 시험대
지난 7월11일 미국 워싱턴의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24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에서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오른쪽 둘째)이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공화국 대통령(맨 왼쪽),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가운데),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맨 오른쪽)와 함께 회의 시작 전 대화를 나누고 있다. AFP 연합뉴스

미국 주도의 일극 체제는 지정학을 다시 불러냈다. 미국이라는 유일한 슈퍼파워를 정점으로 재편된 국제 질서가 ‘고전적 지정학’의 원칙인 세력 균형과 세력권을 무시하는 한편, 서방의 패권 유지라는 ‘근대적 지정학’의 전략적 목표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지정학이 국제 정치에서 다시 풍미하기 시작한 것은 2008년 러시아의 조지아 전쟁이 계기였다. 조지아 전쟁은 러시아가 서방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동진 확장에 맞서 자신들의 전통적 세력권을 다시 확인하는 전쟁이었다.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은 러시아가 “지역 세력”에 불과하다며, 미국에 도전할 수 있는 글로벌 차원의 강국이 아니라고 폄하했다. 하지만 미국은 러시아의 조지아 전쟁에 어쩌지 못했다.

국제 정치 무대에서는 열강들의 지정학적 대결이 다시 시작된 현실을 빗댄 “지정학의 귀환”이라는 말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세계 지정학 질서의 3축인 미국-중국-러시아의 관계가 재정립됐다. 오바마 당시 행정부가 출범할 때 ‘러시아 리셋’ 정책을 표방하고 추구하던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이 물건너갔다. 이와 동시에 미국이 ‘아시아·태평양 시대 선언’ ‘아시아로 회귀’를 표방하며 시작된 중국과의 대결 정책은 러시아와 중국의 접근을 가속화했다. 지금의 ‘반미 중-러’ 연대 공고화의 출발점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열강들의 지정학적 대결은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의 배경이 됐다.

세력 균형의 평화 깨뜨린 패권 독점

우크라이나 전쟁은 지정학의 완전한 귀환을 선포했다. 2차대전 이후 지정학은 서방에서는 사갈시되던 ‘유사 학문’이었다. 양차 대전을 일으킨 열강들의 ‘땅따먹기 학문’이라는 이유로 금기시됐다. 특히 소련 붕괴 이후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국제 질서라는 일극 체제에서 열강들의 대결이란 있을 수 없다는 함의도 있다.

하지만 미국 주도의 일극 체제는 지정학을 다시 불러내는 역설을 초래했다.

첫째는 미국 주도의 일극 체제가 고전적 지정학의 원칙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고전적 지정학의 원칙은 세력 균형이다. 국가나 세력 사이에서 힘의 균형이 유지돼야만, 평화나 패권 질서가 유지된다는 이론이다. 이는 특정 국가가 패권을 유지하려면 상대 국가의 세력권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서로의 영역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원칙이다.

2차대전 이후 미-소 양극 체제는 양대 열강의 대결 구도였지만 서로의 세력권을 인정했다. 미국 주도의 자본주의권과 소련 주도의 사회주의권이었다. 냉전이라는 ‘차가운 전쟁’의 시대였지만, 한편으론 ‘차가운 평화’의 시대라는 측면도 있었다. 소련이 붕괴되자 미국 주도 자유주의 국제 질서는 나토의 동진 확장으로 러시아의 전통적 세력권을 부정했고, 이는 결국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이어졌다. 또 신흥강국으로 급부상한 중국은 미국과 세력권을 놓고 충돌했다. 남중국해에서의 영유권 분쟁, 미국의 ‘항행의 자유 작전’에서 시작해 대만을 둘러싼 ‘하나의 중국’ 원칙 등의 미-중 대결은 전형적인 세력권 분쟁이다.

둘째는 서방에서 발원한 근대 지정학의 전략에 미국이 충실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영국의 해퍼드 존 매킨더로부터 시작된 근대 지정학은 서방 세력의 패권 유지가 전략적 목적이다. 매킨더는 대서양 양안(미국과 서유럽)에 자리한 서방의 패권 유지를 위해서는 유라시아 대륙에서 압도적인 패권 국가의 출현을 막아야 한다는 전략적 목표를 제시했다. 이는 미국의 니컬러스 스파이크먼, 조지 케넌, 헨리 키신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등의 전략가에 의해 구체화됐다.

매킨더는 유라시아 대륙의 ‘심장부’ 지역을 통제해야 한다고 했고, 스파이크먼은 유라시아 대륙의 연안 지역인 ‘환형 지대’를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두 유라시아에서 러시아와 중국을 고립시키고 억제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전략이다. 이는 2차 세계대전 뒤 소련 봉쇄 전략으로 구체화했고, 결국 소련의 붕괴로 이어졌다. 그 이후 부상한 중국에 대해 미국은 오바마 행정부 때 ‘아시아로 중심축 이동’(피벗 투 아시아) 정책을 표방하고,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때에는 인도·태평양 전략을 채택함으로써 대중국 봉쇄 전략을 완성했다.

미 대외정책 유연성 떨어져

지정학의 귀환 시대는 미국 주도의 서방 대 중·러 진영의 대결로 요약된다. 미국은 냉전 시기에 ‘항미 중-소 동맹’을 해체해 ‘반소 미-중 협력체제’로 바꾸면서 승리한 전력이 있다. 케넌이나 키신저는 중국과 러시아의 세력권을 인정해 공존을 주장했다. 미국이 중국의 부상에 맞서야만 한다면 러시아를 미국 쪽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도 했다. 하지만 미국은 무리한 나토 동진으로 러시아를 몰아세우다가 결국 중-러 전략적 연대를 만들어주고 말았다.

미국 전략가 중 대러시아 매파인 브레진스키는 ‘러시아를 막으려면 우크라이나를 분리’해야 하고, 미국에 가장 위협적인 상황은 중-러-이란 연대라고 지적했다. 현재 상황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중-러-이란에 더해 북한까지 유라시아 연대에 가담하는 모양새다. 조 바이든 민주당 행정부 아래서 미국 대외정책의 유연성이 떨어지면서 중·러와 대결이 심화됐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외정책은 공화당의 네오콘(신보수)과 민주당의 신냉전 리버럴 세력에 장악됐다. 고립주의 성향의 트럼프를 반대하는 공화당의 네오콘 세력이 대거 민주당 진영으로 넘어가 영향을 끼치는 요인도 있다.

지정학의 귀환 시대는 다시 변곡점에 직면하고 있다. 오는 11월 미국 대선이다. 누가 당선되더라도, 미국은 이제 지정학 귀환 시대의 열강 대결과 분쟁의 상징인 우크라이나 전쟁과 가자 전쟁 등 중동 위기를 어떤 형식으로든 갈무리해야 한다. 현실은 녹록지 않다. 러시아가 점령지를 굳히고 확장하는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극우정부가 폭주하는 중동 전쟁에 미국의 자원과 대외정책 역량이 소진되고 있다. 중-러 연대는 공고화되고, 글로벌사우스들이 미국의 자장력에서 이탈하고 있다.

카멀라 해리스(민주당 대선 후보)와 트럼프(공화당 대선 후보)는 이런 과제와 도전을 잘 수습할 수 있을까? 해리스는 대외정책에 독립적인 철학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트럼프는 미국이 패권국가로서 치러야 할 비용은 무시하고 동맹에 부담만 요구하고 있다. 중동 정책에서 이스라엘 편향도 우려된다. 미국 대선 이후 두개의 전쟁에 대한 미국의 대처는 지정학의 귀환 시대의 2라운드를 결정할 것이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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