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와 김건희 여사의 공통점은?

안치용 인문학자, ESG연구소장 2024. 10. 19.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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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노벨상의 문장] 한강, <채식주의자>

나는 모르고 있었다. 저 여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채식주의자>(한강, 창비)

뉴스에 두 여자 밖에 안 보인다. 저녁이든 점심이든 사람들을 만나도 두 여자 이야기뿐이다. 두 사람은 한강 작가와 김건희 여사다. 어느 쪽의 비중이 더 높은지는 함께한 사람의 성격에 따라 달라진다. 함께 비교해서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불쾌하겠고, 어떤 이들은 나란히 놓을 사람을 나란히 놓으라고 나를 질책할 것 같기도 하다. 어쩌랴, 뉴스나 세간의 담화가 두 사람뿐인 게 사실인 것을.

뉴스를 도배한 것 말고도 두 사람 사이에 얼핏 비슷하게 보이는 모습이 많다. 나이가 두 살 차이가 나니 같은 시대를 살았다. 물론 삶의 경로나 지향이 달랐지만 그런 건 다 아는 얘기니까 언급할 필요가 없다. 현재 국면에서 두 사람이 모두 주목받기를 싫어한다는 게 가장 큰 공통점이다.

한 작가는 노벨문학상 발표 후 가진 스웨덴 공영 언론과 인터뷰에서 “지금은 주목받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나는 평화롭고 조용하게 사는 것을 좋아한다”며 “글쓰기에 집중하고 싶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다. “나는 조용히 있고 싶다. 세계에 많은 고통이 있고, 우리는 좀 더 조용하게 있어야 한다”고 주목받고 싶지 않음을 부연했다.

한 작가의 얘기는 사실 형용 모순이다. 영어로 ‘Oxymoron’으로 표기되는 형용모순은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는데, ‘oxy’는 날카로운·예리한이란 뜻이고 ‘moron’은 저능아를 뜻한다. ‘똑똑한 바보’라는 의미이니 형용모순이란 어원 자체에 모순이 들어있다. 즉 이미 주목을 피하지 못하고 전국민적 주목을 받는 상황에 “주목받고 싶지 않다”는 말은 별다른 효용이 없다. 물론 그런 소망을 품을 수는 있겠으나 이 또한 ‘똑똑한 바보’ 같은 소망이다. 이제 그가 주목을 피하기는 힘들어졌다. 노력해야 주목을 피할 수 있을 테니, 평화롭게 조용히 지내는 데에 값을 치러야 할 운명이 됐다.

김 여사 또한 ‘오빠’라는 의혹을 받고 있는 부군과 떨어져서 홀로 재보선 선거에 투표하는 등 주목을 극도로 피하는 중인 듯하다. 오죽하면 사진을 내보내지 않았을까. ‘자살 예방의 날’에 마포대교를 순찰한 사진을 비롯하여 드러난 많은 정황은 김 여사가 주목을 매우 즐긴다는 게 정설이다. 주목받기를 누구보다 좋아하는 김 여사가 카메라를 피해 은밀한 동선으로만 이동해야 하는 건 그에겐 참으로 안타까운 일일 터이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두 사람 사이의 차이가 드러난다. 한 작가가 주목을 자발적으로 피하고 있다면 김 여사는 자의에 의하지 않고 억지로 혹은 분노하며 피하고 있다.

또한 한 작가가 비록 주목을 힘들어하지만 인생 최고의 나날을 구가하고 있다면, 주목을 갈망하는 김 여사는 인생의 정점이어야 할 시기에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 큰 차이다. 한 작가가 앞으로 더 좋은 작품을 쓸 수 있겠지만 또 그렇게 기대하지만, 세상의 잣대론 이번이 인생의 정점이다. 김 여사는 어떨까. 어쩌면 힐러리 클린턴처럼 부군과 별개로 더 큰 야망을 펼치는 더 높은 정점을 기대했을 수 있겠지만 이제 정점을 지난 것은 확실해 보인다. 많은 사람이 추락, 그것도 급격한 추락을 예상하는 듯하다. 김 여사가 문학의 캐릭터라면 너무 문학적으로 잘 형상화하였기에 몰입하며 그의 몰락에 눈물을 흘리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든다.

"어둡고 슬픈 게 좋지 않아요? 전 제 소설을 읽은 사람이 슬펐다는 독후감을 들려줄 때가 제일 좋아요."

한 작가가 25살 때 한겨레신문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김 여사의 삶이 문학이라면 어둡고 슬프고 그 독후감 역시 슬플 것 같다. 김 여사의 캐릭터가 문학에서 본 것이었으면 다행이었을 텐데, 현실의 인물이어서 많은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자크 라캉의 용어 중에 '고통스러운 쾌락'쯤으로 이해되는 주이상스[jouissance]라는 게 있다. 프랑스어로 'jouissance'는 ‘향락’이라는 의미이며, 오르가즘 등과 같은 성적 향유나 즐거움까지 포함하기에 영어로 ‘enjoyment’로 번역하나 대체로 영어 번역이 본래 의미를 충분히 살리지 못한다고 본다.

주이상스는 금지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주체에게 주어진 쾌락 향유의 금지를 넘어선 곳에 주이상스가 존재한다. 주체는 향유하면서 여기에 결부된 금지와 제한을 끊임없이 위반하려 든다. 이러한 쾌락원칙의 위반에는 주체가 감당하기 힘든 불쾌나 고통이 뒤따르지만 쾌와 완전히 별개인 것은 아니다. 이 고통스러운 쾌락이 라캉이 말한 주이상스다.

김 여사가 추구한 것이 비유로서 아마 주이상스가 아니었을까. 주어진 쾌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기에 끊임없이 ‘너머’를 추구한, 기웃거리기만 한 게 아니라 실제로 넘어가서 맛본 쾌락. 그리하여 자신과 주변, 또 자신의 위치로 인해 수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일으킨다.

한 작가는 반대로 쾌를 제한하려 든다. 그러나 그것도 또 다른 제한과 금지를 넘어서려는 것이기에 또한 주이상스적이다. 작가는 주체에게 주어진 한계와 제한을 넘어서려는 본능을 지닌 존재이기에 한 작가의 주이상스는 제삼자에게 쾌를 산출한다.

반면 김 여사의 주이상스는 작품이 아닌 권력과 야망에 관한 것이기에 불쾌를 산출한다. 두 사람 모두 이카로스적이다. 이카로스처럼 크레타섬을 탈출하기 위해 비상하려는 욕망을 품지 않는다면 작가가 아니다. 그러나 작가는 안다. 이카로스류의 비상은 추락을 전제한다는 사실을. 추락하기 위해 비상하는 게 작가의 숙명이고 좋은 작가는 필연적으로 추락한다는 것을 안다. 한 작가의 추락은 필연이다.

김 여사의 추락 또한 필연이다. 외양상 같아 보이지만, 김 여사의 추락은 추락을 모면하기 위한 비상이라는 차이를 보인다. 어떤 추락은 소생이지만 어떤 추락은 죽음이다. 김 여사의 주이상스는 죽음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작가의 주이상스는 죽음을 넘어서는 길이다.

인용문은 채식을 선언한 주인공에게 남편이 느낀 감정이다. 갑자기, 익숙한 이가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낯섦이 꼭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개 불편하다. 익숙함이 편하기는 하지만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남편의 상대방은 이때 일종의 주이상스를 체현한다. 익숙함이 편하다는 이유로(누구에게?) 그 익숙함이 언제까지나 유지되어야 할 까닭은 없다.

삶에는 종종 '갑자기'가 필요하다. 삶은 더 낯설어져야 한다. 저 여자에 대해, 저 남자에 대해, 저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에 새로 익숙해져야 한다. 저 여자, 저 남자, 저 사람은 내가 네가 아는 내가 아니라고 갑자기 선언해야 한다. 갑자기 해야 한다. 갑자기 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에.

노벨문학상 소설에서 '아무개 옮김'이 붙지 않은 표지를 보는 것이 낯설다. 익숙한 낯섦이 너무 많은 세상에 즐거운 낯섦이 있어서 다행이다.

▲The poor fool (1915) Amadeo de Souza-Cardoso (Portuguese, 1887 ~ 1918)

[안치용 인문학자, ESG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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