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힌 기억 모아 과거를 담은 초상… 조덕현 개인전 ‘므네모시네’

정자연 기자 2024. 10. 19.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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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엄미술관서 조덕현 개인전 ‘므네모시네’
기억의 현재와, 전통과 근대성에 경의
조덕현 作, ‘므네모시네’. 엄미술관 제공

 

작은 화이트큐브 공간에 정갈하고 근엄한 표정의 인물들의 흑백사진이 내걸려 있다. 정갈하게 한복을 입은 여인과 정장을 입은 말끔한 신사. 흰 천이 여인의 치마와 남성의 정장 바지 아래로 계단처럼 흘러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가만, 자세히 보니 흑백 인물들은 사진이 아니다. 오래된 흑백사진을 캔버스에 섬세하게 옮겨 삶의 시간과 의미를 묻는 회화 작업과, 그 개념을 바탕으로 하는 장르 확장을 통해 흘러간 시간과 기억의 의미를 묻는 조덕현 작가(68)의 회화 작품이다.

엄미술관에서 지난 10일 개막한 조덕현의 개인전 ‘므네모시네(MNEMOSYNE)’는 오랫동안 ‘기억의 파편’을 새롭게 구성하고 복원해온 그의 작업세계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역사라는 거대 서사와 담론에 가려진 다양한 개인의 주관적인 삶이 조명된다.

주인공은 고미술 수장가이자 일제강점기 개성의 신진 엘리트였던 욱천 진호섭(秦豪燮·1905~1951)과 그의 주변 인물들이다.

조덕현 作, ‘므네모시네’, 미술관 2층 전시 전경. 엄미술관 제공

흑백사진을 그대로 내건 듯한 작품들은 과거 사진에 대한 편견을 깬다. 사진 속 인물들의 의복은 기품 있고 세련됐다. 주변 배경은 근현대만의 고풍스러움이 살아 있다. 때론 정장을 입거나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인물들은 부부 사진, 독사진, 결혼식 사진, 가족 사진 등을 통해 누군가의 이야기에서 마치 모두의 이야기로 확장되는 듯하다.

흑백의 그림과 파도 혹은 햇빛에 물이 반짝이는 영상이 교차되는 설치 작품 1에선 물이 가진 원초성이 관람자가 가진 기억을 자극해 상상의 세계를 펼치게 한다.

조덕현 作, ‘므네모시네’. 엄미술관 제공

조덕현 작가는 사진 드로잉과 발굴 작업, 사진 등 다양한 작업 방식을 선보여왔다. 이 다양한 작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기억’이다. 오래된 흑백사진의 이미지를 캔버스 위에 연필과 목탄으로 그리는 사진 드로잉은 기록된 역사의 표층에 가려져 있는 과거의 기억을 복원한다. 단순히 사진을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이야기를 현재적인 사건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이번 작업에서 작가가 욱천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전시 개막에 앞서 기자와 만난 작가는 “사진에 나타난 인물과 배경 하나하나의 예술성과 그 인물들이 갖고 있는 보편성”을 꼽았다. 사진 원본이 모두 다 감동으로 작가에게 다가왔다. 하나하나 인화된 사진이 갖고 있는 시공간의 깊이, 그걸 번역하기 위해서 그는 노력했다.

전시실 2층 전경. 조 작가의 작품(왼쪽)과 추상조각가 엄태정의 시구가 담긴 인스톨레이션. 정자연기자

그의 노력은 7점의 캔버스 회화와 거울과 모니터로 구성된 영상 설치 작업, 골동품 오브제를 활용한 가변 설치, 추상조각가 엄태정의 시구(時句)가 담긴 인스톨레이션 등 총 10점의 신작으로 구성됐다. 작품 하나하나의 이야기가 저마다 살아나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조각가 엄태정의 시를 텍스트로 선보여 미술관 자체가 인물의 역사가 된다.

“재료가 너무 좋아서 그냥 충실하게 그려냈다”는 조 작가는 “대신 깊이 있게 사유를 진작시켜보려 했다”고 말했다. 화이트큐브의 공간에서 어떻게 개인의 역사 하나하나를 그림이 풍부한 시공간을 담보해 관람자와 호흡할지 공을 들였다.

엄미술관 1층 전시 전경. 조덕현 作, ‘므네모시네’ 설치작품과 회화 작품. 엄 미술관 제공

작품마다 품은 시공간의 이야기가 다른 만큼 작품마다 조명을 달리했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벽면에 작은 골동품을 오브제로 설치해 기억에 관한 테마를 강조했다. 관객의 몰입을 위해 작가가 숨겨놓은 장치를 찾아보는 것도 전시를 즐기는 또 다른 묘미다.

전시는 특정한 주제의식이나 서사가 없다. 관람객이 자유롭게 몰입하고 느끼고 해석하게 의도됐다. 전시 제목을 ‘므네모시네’로 택한 것도 이러한 이유. 므네모시네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기억의 여신이나 잘 알려지지 않아 모호하면서도 기억이란 단어를 어렴풋이 환기해준다.

조덕현 作, ‘므네모시네’ 설치작품. 엄미술관 제공

“관람객이 보고 해석하는 게 작품의 최종 완성품”이라는 작가는 “다만 기대감이 있다면 40억년을 지나온 인류의 진화처럼 누군가는 소급해서 올라가 그런 까마득한 기억까지 그려볼 수 있는 전시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물속에 아메바 형태이던 세포들이 진화해서 바다에서 육지로, 또 진화해 오늘날 인류의 형태로 올라가는 상상을 (전시를 통해) 할 수 있는…. 작품 속 사람들이 누군지 알 순 없지만 ‘요즘 얘기 같다, 옛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게 살았구나, 오늘에 과거가 숨어 있다’ 이런 느낌이요. 그래서 위화감을 주지 않고 미술관에 처음 오시는 분도 이해하기 쉽고 공감할 수 있는 시간이 됐으면 합니다.”

이번 전시는 엄미술관에게도 특별하다. 전시에서 드러내 밝히지 않으나 욱천 진호섭은 진희숙 엄미술관장의 부친이다. 누군가의 역사와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역사를 떠올려보고, 미술관과 전시 곳곳에 숨겨진 의미를 찾는 재미가 있다.

조덕현 作, ‘므네모시네’. 엄미술관 제공

진 관장은 “기억을 테마로 하는 조덕현 작가의 전시는 과거에 함몰되어 의미를 찾지 못하는 다양한 기억들을 현재로 가져와 새롭게 하고 나아가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야 할 미래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해주는 계기가 될 것”이라 전했다.

이어 “거시적으론 오늘날 기술이 대변할 수 없는 ‘인간성’ 및 ‘주체성’의 회복에 관한 이야기이며, 미시적으로는 우리의 전통과 근대성에 경의를 표하는 하나의 오마주 작업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전시 연계 프로그램론 과거의 인물과 기억, 그림 속에 숨겨진 진실을 탐색해보는 자리도 마련된다. 가천대 명예총장이자 초상화 연구가인 이성낙 박사와 함께하는 ‘아이코노그래피(Iconography), 시대의 얼굴을 진단하다’는 전시를 더욱 풍부하고 깊이 있게 할 예정이다.

전시는 내년 1월 31일까지.

정자연 기자 jjy84@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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