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한강을 만나볼 결심

동아일보 문화부 출판학술팀 2024. 10. 19. 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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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한림원이 추천한 한강의 작품
《스웨덴 한림원 회원이자 소설가인 스티브 샘 샌드버그는 13일(현지 시간) 노벨상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한강 작가의 작품 중 ‘채식주의자’ ‘희랍어 시간’ ‘소년이 온다’를 추천했다. 한강 작가의 소설을 찾는 전 세계 독자들 에게 한림원이 ‘입문서’를 제시한 것. 작품들에는 한강 작가의 고유한 스타일과 문학적 정수가 녹아 있다는 평가다. ‘한강 읽기’를 시작하려는데 뭐부터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렇다면 이 책들을 먼저 펴봐도 좋겠다.》

채식주의자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불꽃’ 등 중편 소설 3편으로 엮은 연작 소설로 2007년 출간됐다. 갑자기 육식을 거부하는 주인공 ‘영혜’를 보는 남편, 형부, 언니의 시선을 각각 담았다. 2016년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에 이어 2017년 스페인 산클레멘테상을 받았다.

어느 날 꿈에 나타난 끔찍한 영상에 사로잡힌 영혜는 육식을 거부한다. “아내가 평범한 여자라 좋았다”는 무관심한 남편은 영혜가 변한 이유에 관심이 없다. 그저 처가 식구들을 동원해 그녀의 ‘못된 습관’을 고쳐 놓으려 한다. 영혜의 아버지는 이에 동조하며 딸을 때려서라도 고기를 먹이려 하지만, 영혜는 이를 거부하고 자해한다.

비디오 아티스트인 형부는 아내 ‘인혜’에게서 “동생의 몸에 몽고반점이 남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 영혜에게 성적 욕망을 품게 된다. 처제인 영혜에게 자신의 작품 모델이 되어 달라고 요청하고, 영혜와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언니 인혜는 동생과 남편의 불륜을 목격했음에도 정신병원에 입원한 동생을 지극히 보살핀다. “나는 나무라서 물과 햇빛만 있으면 된다”며 섭식을 거부하는 동생을 보면서 인혜는 복잡한 내면의 변화를 맞게 된다. 2016년 영국 부커상 수상작.

한림원의 추천 이유
주인공 영혜가 음식 섭취라는 규범을 따르기를 거부하면서 발생하는 폭력적 결과를 묘사한다. 혐오, 성적 매혹, 질투 등 주변 인물들의 다채로운 반응을 그린다. 이는 가족에게 수치심을 안겨줬다는 죄책감을 인정하지 않고 묵묵히 저항하는 영혜의 태도와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 구조와 직업주의, 때로는 폭압적인 사회 규범과 관습에 대한 날카로운 자화상을 엿볼 수 있다.

희랍어 시간

어떠한 전조도 없이 말을 잃어가는 한 여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한 남자가 만나 함께 빛을 찾아가는 이야기. 여주인공은 가정 폭력으로 언어 장애를 겪고 있으며 남자 주인공은 유전병으로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고 있다.

이후 이혼하고, 아이의 양육권도 빼앗기는 등 일상의 모든 것들을 다 놓을 수밖에 없었던 여자가 선택한 것은 이미 저물어 ‘죽은 언어’가 된 희랍어. 여주인공은 더 이상 잘 사용되지 않는 희랍어는 더는 그녀를 해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의사소통 능력을 되찾기 위해 고대 희랍어 수업을 듣는다.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 주인공은 그녀의 그리스어 교사다. 남자는 독일에서의 삶과 자신의 상처를 털어놓고 여자는 그 얘기를 말없이 듣는다.

두 사람은 서로를 통해 자신이 잃어버린 감각을 되찾고 세상과의 소통을 회복하려는 여정을 시작한다. 2011년 국내에 처음 출간됐으며 영어, 스페인어 등으로 번역 출간됐다. 출간 후 10여 년이 흘렀지만 어느 순간에 접하더라도 두 인물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읽힌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림원의 추천 이유
‘희랍어 시간’은 짧고 강렬하면서도 주인공을 심리적으로 꿰뚫어 풀어내는 듯한 강점이 있다. 또 외부세계와 연결되는 가장 중요한 연결고리를 잃었거나 잃기 시작한 두 사람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그려내는 초상화이기도 하다. 책은 말과 언어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말이 어떻게 우리의 외부 세계와 내부 세계에 형태와 의미를 부여하는지 고찰한다. 동시에 우리 모두에게 가장 중요하고 섬세한 정체성을 파괴하는데 말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서도 담고 있다.

소년이 온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한강의 6번째 장편소설이다. 2014년 출간 후 한국 만해문학상, 이탈리아 말라파르테 문학상을 받았다.

소설은 1980년 중학교 3학년인 소년 동호의 시선에서 시작된다. 동호는 광주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친구 정대가 계엄군게 살해되자, 시민군의 시신을 관리하는 일을 돕는다. 매일 시신들을 수습하면서 동호는 여러 생각에 빠진다. 주검들의 말 없는 혼을 위로하기 위해 초를 밝히고, 친구 정대의 처참한 죽음을 떠올린다.

이 외에도 유령이 된 정대, 경찰에 잡혔던 은숙, 아들을 잃은 동호 어머니 등 광주민주화운동과 엮인 다양한 인물을 통해 다층적으로 당시를 회고한다. “발가락들은 외상이 없어 깨끗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생강 덩어리들처럼 굵고 거무스레해졌다”처럼 시민군의 처참한 죽음을 묘사한 생생한 표현이 압도적이다.

정치적 담론보다는 인간의 내면적 고통에 집중한 점이 특징이다. “이 소설을 통과하지 않고는 어디로도 갈 수 없다고 느꼈다”는 한강 자신의 고백처럼 한강의 작품세계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을 받았다.

한림원의 추천 이유
서구 문학의 원형으로 꼽히는 고대 그리스 비극 ‘안티고네’에 비견되는 작품이다. 환영이 어른거리는 듯하면서도 간결한 스타일로 예상을 비켜 간다. 묻을 수 없는 신원 미상의 시체들을 볼 때는 소포클레스 ‘안티고네’의 모티브가 떠오른다. 한강은 자신이 자란 도시인 광주에서 1980년에 벌어진 역사적 사건을 정치적 배경으로 삼았다. 소설은 희생자에게 목소리를 부여하고, 잔혹한 현실을 생생히 그려내 ‘증인 문학’ 장르에 접근한다.

“가장 최근 작품에 애정… 첫 독자라면 ‘작별하지 않는다’와 시작하길”

한강 작가 추천작

“모든 작가는 자신의 가장 최근 작품을 좋아합니다. 제 최근작인 ‘작별하지 않는다’가 시작이 되길 바랍니다.”

10일(현지 시간) 노벨 문학상 수상자 발표 직후 스웨덴 한림원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한강 작품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 어떤 책을 추천하겠느냐”는 질문에 대한 한강의 답변이다. 2021년 발표된 이 작품으로 한강은 지난해 프랑스 4대 문학상인 메디치 외국문학상을 받았다.

한강은 출간 당시 기자간담회에서 “제주4·3사건을 다룬 소설, 죽음에서 삶으로 건너가는 소설,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 모두 맞습니다. 하지만 하나를 고르자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작품 속 주인공 경하는 어느 겨울날 목공 일을 하는 친구 인선으로부터 급한 연락을 받는다. 통나무 작업을 하던 중 사고로 두 손가락이 잘려 봉합수술을 받게 됐다는 것. 곧장 병원을 찾은 경하에게 인선은 제주 집에 가서 혼자 남은 새를 구해 달라고 부탁한다. 경하는 친구의 간절한 부탁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그 길로 제주로 향한다.

경하는 인선의 집에서 70년 전 제주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과 얽힌 가족사를 마주하게 된다. 인선의 어머니 정심은 제주4·3사건 희생자 유족이었다. 경하는 인선과 정심이 수집한 기록을 보며 가슴 아픈 현대사를 실감한다.

한강은 1990년대 후반 제주에서 몇 달간 살았을 때 주인집 할머니로부터 4·3사건 당시 학살 이야기를 듣고 작품을 구상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기자간담회에서 “제가 작품 소재를 정하기도 하지만 어떤 장면이 떠오르면서 스스로 알고 싶어지는 것이 있다”며 “제주에서 있었던 민간인 학살에 대해 쓸 계획이 없었는데 이 소설을 쓰게 됐다”고 했다.

한강이 그려내는 삶은 슬프면서도 아름답다. 소설 도입부에 나오는 경하의 꿈 역시 간절하고 비극적이다. 눈 내리는 벌판,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가 마치 묘비처럼 심겨 있다. ‘묘지가 여기 있었나’ 생각하는 순간 발아래로 물이 차오르고, 그는 무덤들이 바다로 쓸려가기 전에 유골을 옮겨야 한다고 생각하다 꿈에서 깬다. 어쩌지 못한 채.

동아일보 문화부 출판학술팀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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