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32역 김성녀 “20살 아가씨역 괜찮겠죠”

모노드라마 ‘벽 속의 요정’ 20주년 기념공연을 앞둔 ‘천의 얼굴’ 배우 김성녀. [사진 극단 미추]

“스무살 처녀 연기, 관객이 용서해 주시겠죠.”

‘천의 얼굴’의 배우 김성녀(74)의 모노드라마 ‘벽속의 요정’(10월31일~11월10일)이 초연 20주년을 맞아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오른다. 2005년 송승환의 PMC프로덕션 기획 ‘여배우시리즈’ 중 하나로 시작했고, 초연 당시 전회 기립박수 등 폭발적인 반응과 함께 동아연극상·대한민국예술상을 수상했다. 지난 20년간 코로나 팬데믹 2년을 제외하고 한해도 빠짐없이 국내외 무대를 누빈, 공연계 전무후무한 레퍼토리다.

1950년대 좌우익 이념 대립 속에서 반정부인사로 몰려 벽 속으로 피신해 숨어살게 된 아버지와, 아버지를 ‘벽속의 요정’이라고 믿으며 성장하는 여인을 축으로 무려 32명의 인간군상이 등장하는 2시간짜리 이야기를 김성녀가 홀로 춤추고 노래하며 풀어내는 무대다. 판소리를 전공하고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을 지내며 창극 대중화를 이끈 김성녀라서 가능한 ‘현대판 판소리’다.

원전은 스페인 내전 당시 이데올로기 문제로 40년간 벽 속에 갇혀 산 실존 인물의 딸 마리아가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이를 일본 연출가 후쿠다 요시유키가 모노드라마로 무대화했고, 원래 한국판의 주인공은 고 김민기 연출과 배우 김혜자가 될 뻔했다. 그런데 일본 제작자가 김민기에게 판권을 넘긴지 5년이 되도록 소식이 없자, 극단 미추의 손진책 연출과 김성녀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춤과 노래까지 자유자재인 김성녀에게 딱 맞는 작품”이란 이유였다.

‘벽 속의 요정’에서 어린 소녀를 연기하는 김성녀.

‘벽 속의 요정’이 김성녀의 인생작이 된 경위다. 김성녀는 이 작품을 “나의 월계관이자 가시관”이라고 표현했다. 5살 때부터 요즘 드라마 ‘정년이’로 재조명받고 있는 여성국극을 시작으로 온갖 무대를 누벼왔지만, 30년간 방송된 MBC 마당놀이로 워낙 유명해진 터라 ‘연극배우’라는 인식이 엷어졌었다. “여배우들이 모노드라마를 하나씩 갖고 있을 때인데, 나는 55세에 겨우 하게 됐어요. 남편의 극단에 있다보니 오히려 내 모노드라마를 제작하기 꺼렸던 건데, 송승환씨가 판을 깔아준 덕에 할 수 있었죠. 공연 첫날 실수도 하고 모노드라마의 어려움을 실감하고 있었는데 기립박수가 터져나온 거예요. 그때만 해도 기립박수가 잘 없었거든요. 그 쓰나미 같은 감동을 잊지 못해 지금껏 겁 없이 달려왔습니다. 내게 연극배우라는 위상을 돌려준 작품이지만 2시간 동안 혼자 감당하기 고통스럽고, 시대에 뒤처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도망가고 싶기도 해요.”

한국전쟁 직전부터 90년대까지를 배경 삼은 오래된 무대인데다 초연 그대로 수정된 부분도 없지만, 모든 시즌에 꾸준히 찾아오는 마니아 팬덤이 있을 정도로 변함없는 관객의 호응을 얻고 있다. 손진책 연출은 “창작에 가까운 배삼식의 대본과 박동우의 미술, 최보경의 의상, 안은미의 안무까지, 이 작품은 묘하게 20년 동안 수정이 필요없었다. 생명의 고귀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찬가라는 게 시대를 초월한 주제이기 때문인 것 같다”고 했지만, 김성녀의 1인 32역 신들린 변신을 보는 재미가 크다.

꾸준한 인기 덕에 20년간 공연을 이어오면서도 한번도 스스로 제작한 적 없었다는 것도 흥미롭다. 지방 투어와 중국, 일본, 미국까지 모두 초청을 받아 갔고, 20주년 기념 공연은 세종문화회관이 공동주최로 나섰다. 2006년 예술의전당에서 처음 공연을 봤다는 안호상 세종문화회관 사장도 그 연기에 매혹된 마니아 중 하나다. “연기가 어찌나 찰지고 변신이 능수능란한지 혀를 찼다. 이런 배우가 있구나 싶어 팬이 됐고, 거의 숭배자가 됐다”는 게 그의 말이다.

5살 어린아이부터 20대 여인, 70대 노부부까지 버라이어티한 변신에 “커튼콜에 32명이 나올 줄 알았다”는 평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5살부터 여성국극과 판소리로 단련된 그에게 변신은 자연스런 일이다. 연극 ‘햄릿’에서 호레이쇼를 맡는 등 남장에도 탁월하고, ‘남자 연기를 할 때 유독 멋있다’는 게 정설이다. 다만 “죄송스러운” 장면이 하나 있다. 스무살 처녀 역할이란다. “20대 예쁜 아가씨가 돼야 하거든요. 70살 넘어서 요염부리고 춤추고 연애하는 씬이 그렇게 죄송스러울 수 없어요. 징그럽지 않을까 싶고.(웃음) 그래도 관객이 다 용서해 주셔서 하고 있습니다.”

55세 시절의 김성녀와 지금의 그가 결코 같지 않은 것처럼, ‘벽 속의 요정’의 20년간 337회 공연도 매번 똑같은 적이 없단다. 어쩌면 그게 생명력 아닐까. “전국을 돌아다녀서 그런지 한번도 똑같은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매번 다른 장면에서 눈물이 나고, 관객의 추임새도 매번 다르니까요. 초기엔 활화산처럼 에너지를 쏟아내느라 힘이 들었지만, 이젠 힘조절이 가능해졌죠. 12곡 노래를 불러야 하는데 이제 높은 청이 안 나오는 대신 깊어진 연기로 나이에 맞게 하자는 생각이에요.”

모노드라마를 쉼없이 20주년 이어왔다는 것은 거의 없는 기록이다. 김성녀의 도전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혼자 춤추고 노래하는 공연을 몇 살까지 할 수 있을지 도전하고픈 마음은 굴뚝같지만, 완성도에 대한 욕심이 있거든요. 이번 열흘 동안의 공연이 잘 되면 30년까지 가고, 내 맘에 안들면 이걸로 마무리하고 싶어요.”

이미 김성녀 혼자만의 도전은 아닌 것 같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