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프리즘] 라스푸티차의 늪

박신홍 2024. 10. 19.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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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홍 정치사회에디터
나폴레옹은 거침이 없었다. 1812년 프랑스군은 단번에 러시아 심장부까지 진출했다. 파죽지세였다. 하지만 러시아가 주요 거점을 모두 비우고 후퇴하는 ‘청야 전술’을 구사하면서 속전속결 전략은 난관에 부딪혔다. 나폴레옹은 계속 밀어붙였지만 가을이 오자 전장은 온통 진흙탕으로 변했고 주력부대인 포병대는 옴짝달싹할 수 없는 처지에 몰렸다. 라스푸티차의 늪에 빠져버린 것이었다. 식량과 의료품을 수송하던 마차도 본진과 격리됐고 설상가상 러시아의 혹독한 겨울까지 닥치면서 결국 전투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추위와 굶주림에 상당수 병력만 잃은 채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천하의 나폴레옹이 몰락하는 변곡점이었다.

「 나폴레옹도 넘지 못한 깊은 수렁에
이젠 여권 전체가 급속히 빠져들 판

히틀러도 거침이 없었다. 1941년 나치 독일은 소련 중심부를 향해 진격했다. 이때만 해도 기세등등했다. 하지만 모스크바 함락을 눈앞에 두고 가을에 접어들면서 그 또한 라스푸티차의 늪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계속된 폭우에 길이 엉망진창이 되자 히틀러가 자랑하던 전차부대는 오도 가도 못한 채 진군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진흙에서 수영해야 했다”는 기록이 당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에 평소보다 겨울이 일찍 찾아오자 한파와 진흙 수렁의 이중고에 속수무책 노출되면서 천하의 히틀러도 결국 탱크와 장갑차를 버리고 퇴각해야만 했다.

라스푸티차는 매년 봄·가을에 러시아 서부와 벨라루스·우크라이나 일대가 온통 뻘로 변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3~4월엔 한겨울에 얼었던 땅이 녹아, 10월 중순 이후엔 우기의 집중호우로 거대한 평원이 순식간에 진흙탕의 늪으로 바뀌면서 모든 길이 사실상 마비 상태가 된다. 사람도 다니기 힘든 도로를 탱크나 기마 부대로 밀어붙여봤자 전진은커녕 수렁에 빠져 꼼짝 못하게 되기 십상이다. 심지어 전쟁 역사상 가장 거침없이 내달렸던 13세기 몽골군도 결국 라스푸티차를 넘지 못하고 후퇴했을 정도다. 유럽의 역사를 바꾼 기록적인 패배와 퇴각엔 어김없이 라스푸티차의 늪이 도사리고 있었던 셈이다.

문제는 이 같은 역사의 데칼코마니가 오늘날 한국 정치에서도 반복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최근 여권의 혼돈 양상이 위험수위를 넘나들고 있다는 점에서 위기의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침없이 국정을 추진하던 여권이었지만 어느새 각종 의혹이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고 이를 둘러싼 내부 분열이 가속화하면서 여권 전체가 깊은 늪의 수렁에 빠져드는 모습이다. 콘크리트 같던 전통적인 지지층조차 등을 돌릴 기미를 보인다는 점 또한 충격적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여권 곳곳에선 긴장하긴커녕 자책골만 쏟아내고 있다. 교육부총리는 의대를 6년에서 5년으로 줄이는 방안을 불쑥 내놓더니 비난이 쏟아지자 이틀 만에 말을 거두고, 국민의힘 중진들은 특정인과의 연루설이 불거질 때마다 강하게 부인하거나 반박하더니 상대방의 재반박에 금세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안보실 핵심 참모는 아세안 순방에 나선 대통령이 연설하는데 바로 뒷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모습이 찍혀 논란을 자초하고. 한 발만 내디뎌도 쑥 빠져들 뻘을 앞에 두고 널빤지라도 가져와야 할 내각과 여당과 대통령실이 되레 너도나도 한 줌 모래를 더 쏟아붓고 있으니, 나사가 빠진 모습이 말 그대로 ‘뻘짓’이 따로 없다 싶을 정도다.

이대로 가면 수렁은 더욱 깊어질 거고 진흙탕의 늪은 ‘듄’의 초대형 모래벌레처럼 더욱 강력한 힘으로 지상의 모든 존재를 집어삼킬 것이다. 국정감사가 끝나면 국면 전환을 위한 특단의 조치가 불가피하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역사는 늘 반복되는 법. 라스푸티차의 늪은 피하고 보는 게 상책이다. 여기서 허우적대다 보면 곧 동토의 겨울이 찾아오고, 땅이 꽁꽁 얼어붙어 병참선마저 끊기면 퇴각도 힘들어진다. 10월 중순도 다 지나가고 있다. 시간이 많지 않다.

박신홍 정치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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