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소] ‘문송’하지 않습니다

송혜진 기자 2024. 10. 19.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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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넘게 홀대받은 문과생
노벨상 수상에 “설움 씻었다”
빅테크도 갈수록 문과생 채용
스티브 잡스도 ‘문과’였다

“여러분의 자녀가 인문학이나 철학을 전공하셨다면 근심이 클 것입니다. 자녀분이 졸업장을 들고 정당하게 취직하려면 고대 그리스에나 가야할 테니까요.”

미국의 명(名)코미디언 코넌 오브라이언이 2011년 다트머스 대학 졸업식장에서 남긴 이 축사는 전설처럼 회자된다. 오브라이언 자신도 하버드대에서 역사·문학을 전공했다. 문과생의 취직난은 이미 오래전부터 한국을 넘어 전 세계의 뿌리 깊은 고민이었던 셈이다.

‘문송하다(문과생이어서 죄송하다)’라는 말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유행어가 된 지도 10년가량이 됐다. 그간 문과생들은 적지 않은 굴욕과 수난을 당해왔다. 2014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사람들이 역사학이 아닌 상거래나 제조업을 택하면 돈을 더 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가 사과했다. 영국에선 최근 정부가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인재를 기르겠다는 기치 아래 인문학 예산을 삭감하면서 A레벨(수능시험과 비슷함)의 영어 과목을 선택해서 듣는 학생이 20%가량 줄기도 했다.

문과생은 정녕 21세기의 불가촉천민이 되어가는가. 우울한 상황에도 단비는 내린다. 우리나라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요 며칠 소셜미디어엔 ‘문밍아웃(문과생 커밍아웃)’이 넘실거렸다. “국문과를 나오면 무엇을 하는가? 노벨문학상을 타는 것이다!” “‘문송합니다’, 금지!” “문과는 결국 승리한다!”

이들의 환호성을 보며 인문학도들의 오랜 설움이 노벨상 수상을 기점으로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는 생각을 했다. 문과생이 서러운 것은 전 세계적 현상이라지만, 대한민국에선 유독 심했다. 우리나라에서 지난 10년간 인문학 연구 자금은 3000억원에 묶여 오르질 못했다. 2019~2021년 사이 서울에선 인문·사회계열 대학에서만 학과 17개가 사라졌다. 공학 계열 학과는 반면 23곳이 새로 생겼다.

이런 상황에서도 콤플렉스 많기론 어디 가서 지지 않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넘을 수 없는 벽으로 여겼던 노벨상을, 1970년생 국문과 출신의 여성이 받아버린 것이다. 대한민국 문과생들이 “문과란 이런 것!”이라고 함성을 토한 건, 이번 노벨문학상 수상이 장기간의 투자와 연구 끝에 빛을 발하는 인문학의 가치를 경시해 온 시대 풍토에 경종을 울린 사건이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문과생들에게 몇 가지 사실을 더 알려주고 싶다. 작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가 21~54세 인문대 졸업생 9000명의 경력을 조사했을 때 이들의 직업 만족도는 국민 평균을 훨씬 뛰어넘었고, 소득도 국가 평균보다 훨씬 높았다. 보고서는 또한 인터뷰에 응한 기업 CEO의 대부분이 인문학 전공자들의 위기 대처 능력이 기술 전공자들보다 뛰어나 채용했다고 했다.

책 ‘놀라운 힘’을 쓴 조지 앤더슨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그는 미국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과학 기술 전공자만을 찾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지 않는다고 했다. 가령 우버사(社)가 고객 불만족 개선을 위해 찾아나선 것은 심리학 전공자였고, 레스토랑 플랫폼 업체 오픈테이블이 서비스 혁신을 위해 채용한 이들은 영문학 전공자들이었다. 앤더슨은 “사람과 소통하는 능력,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능력이 결국 어떤 직업 기술보다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고 썼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빅테크 기업의 CEO들이 우상처럼 떠받드는 고(故) 스티브 잡스도 알고 보면 문과생이다. 그는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리드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소크라테스와 점심 한 끼를 할 수 있다면 애플이 가진 모든 기술을 맞바꿔도 좋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니 문과생들이여, 어깨를 펴자. 그대들은 더는 ‘문송’하다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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