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군가는 피해자이자 가해자란 '불편한 진실' [전쟁과 문학]

이정현 평론가 2024. 10. 18.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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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쿠프 전쟁과 문학 38편
「문밖에서」의 주인공 베크만은
전쟁이 남긴 가해자이자 피해자
부하를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전쟁으로 부모와 아내를 잃어
전쟁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문밖에서」 청취하며 위로 받아
독일 고통과 슬픔 대변하는 상징

볼프강 보르헤르트가 집필한 「문밖에서」의 주인공 베크만은 제2차 세계대전이 남긴 가해자이자 피해자다. 연대장의 명령을 받고 부하를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그 역시 전쟁으로 부모와 아내를 잃었다. 당시 대다수 독일인은 나치 지시에 따라 유대인 학살과 전쟁에 동참했다. 그들은 모두 피해자이기에 앞서 가해자였다. 「문밖에서」는 그 불편한 진실을 토로한 작품이다. 우리의 현실은 어떨까.

대부분의 인간은 피해자이기에 앞서 가해자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폐허가 됐다. 국토는 미국ㆍ영국ㆍ프랑스ㆍ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됐고, 국가 시설 대부분이 파괴됐다. 전범 국가로 낙인찍힌 독일은 피해를 호소할 수도 없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유럽 중앙에 자리한 독일은 미ㆍ소 냉전의 무대가 됐고, 희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1947년 2월 13일, 폐허만 남은 독일 전역에서 「문밖에서」라는 라디오 방송극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라디오 방송극은 불과 26세인 작가 볼프강 보르헤르트(1921~1947년)의 작품이었다.

'문밖에서'의 주인공 '베크만'은 열아홉살 때 나치에 징집돼 동부전선에 투입된 후 생환한 작가의 경험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동부전선에서 부상당해 고향으로 돌아온 베크만은 다른 남자와 살림을 차린 아내를 보고 좌절해 엘베강에 투신하고자 한다.

강물에 몸을 던지기 전 베크만은 자살을 만류하는 한 여자를 만난다. 베크만은 죽고 싶은 마음을 다잡고 그녀와 함께 살아간다. 몇 달 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실종됐던 그녀의 남편이 목발을 짚고 나타났다. 그녀의 남편은 동부전선에서 베크만 휘하에 있던 병사였다. 한쪽 다리를 잃은 부하는 베크만을 원망한다. 동부전선의 악몽이 떠오른 베크만은 도주하지만, 부하는 극이 끝날 때까지 목발 소리를 내며 그를 쫓아다닌다.

죄의식에 젖은 베크만은 옛 상관을 찾아간다. 연대장은 전장에서 부하들을 사지로 몰고 자신의 안위만 추구하던 인물이었다. 연대장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베크만은 격렬하게 항의하지만, 연대장은 베크만을 기억하지도 못한다. 오히려 연대장은 베크만에게 독일 남자답게 현재의 고난을 이겨내야 한다고 호통을 친다.

베크만은 전쟁의 악몽을 엄살과 익살로 바꿔 코미디 배우를 해보라는 연대장 권유에 따라 한 극단에 들어간다. 베크만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인극 연기를 선보인다. 그러나 극단 단장은 베크만을 우습게 여긴다. "진실로는 성공할 수 없어. 진실을 말하는 자는 대중에게 비호감을 선사할 뿐이야."

[사진=더스쿠프 포토]

좌절한 베크만은 부모님을 찾아 고향으로 가지만, 부모님의 집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나치 시절 유대인 학살에 동참했던 베크만의 아버지는 패전 후 전범 혐의로 공직에서 쫓겨났고, 어머니와 함께 가스를 틀어 동반 자살했다. 베크만은 전쟁터에서 연대장 명령을 받고 부하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가해자이자, 전쟁으로 부모와 아내를 잃은 피해자였다. 베크만의 아버지를 유대인 박해자로 설정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당시 대다수 독일인은 나치 지시에 따라 유대인 학살과 전쟁에 동참했다. 그들은 모두 피해자이기에 앞서 가해자였다. 그러나 패전 직후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복종했던 나치당을 악마화하면서 무죄를 입증하려고 했다. 보르헤르트는 「문밖에서」에서 그 불편한 진실을 토로했다.

이런 진실을 담은 작품이 극장과 출판사에서 환영받을 가능성이 없다고 체념한 보르헤르트는 작품에 "공연하려는 극장도, 보려는 관객도 없는 작품"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그의 우려와는 달리 라디오극으로 송출된 「문밖에서」는 독일 전역에서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문밖에서」를 청취하며 충격과 위로를 받았다. 라디오 방송국에는 보르헤르트의 작품을 응원하며 재방송을 요구하는 청취자들의 편지가 쇄도했고, 보르헤르트는 독일 전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떠올랐다.

1921년 함부르크의 에펜도르프에서 태어난 보르헤르트는 15세 때부터 시를 창작한 감수성 예민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광풍은 문학에 심취한 낭만적인 젊은이의 삶을 처절하게 짓이겼다.

1941년 7월 육군에 징집된 보르헤르트는 바이마르에서 전차부대 통신병으로 근무하다 동부전선에 배치됐다. 1942년 초 보르헤르트는 전장에서 보초 근무 도중 총상을 입어 후송됐지만, 전장을 이탈하려고 자해를 했다는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사형 집행을 기다리며 교도소에 갇혀 있던 그는 곧 석방됐다. 병력 부족에 시달리던 독일군은 죄수들을 최전선에 배치했고, 보르헤르트가 소속된 부대는 혹독한 피해를 입었다.

1942년 12월, 발진티푸스에 걸린 보르헤르트는 스몰렌스크의 야전병원에 입원했다. 그곳에서 그는 병사들이 무더기로 죽어 나가는 참상을 목격했다. 1943년 9월 첫 휴가를 받은 보르헤르트는 고향 함부르크를 방문할 수 있었지만, 두 달 전 함부르크는 연합군의 '밀레니엄 작전(1000대의 폭격기로 함부르크를 초토화한 연합군의 작전)'으로 거대한 채석장으로 변해 있었다. 쇠약해진 육체에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은 그는 복무 부적격 판정을 받고, 후방의 극단에 배치됐다.

하지만 보르헤르트는 나치 선전장관 괴벨스를 조롱하는 발언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다시 체포돼 베를린 모아비트 교도소에 갇혔다. 종전과 함께 보르헤르트는 프랑스군 포로가 됐으나 포로수용소로 압송되던 중 탈출해 600㎞가 넘는 길을 걸어 겨우 고향 함부르크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보르헤르트는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을 가누면서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46년 1년 동안 보르헤르트는 수십편의 산문과 시를 발표했고, 1947년 1월에 불과 일주일도 되지 않은 기간에 방송극 '문밖에서'의 원고를 집필했다. 사방에서 원고 요청이 빗발쳤으나 이미 병세가 악화한 보르헤르트는 응할 수 없었다.

1947년 10월, 반전 선언문 '그러면 답은 딱 하나뿐이다'를 발표한 보르헤르트는 한 달 후 요양병원에서 사망했다. 집필 기간은 2년에 불과했지만,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문체를 지닌 보르헤르트의 짧은 작품들은 전후 독일의 고통과 슬픔을 대변하는 상징이 됐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보르헤르트의 산문 「이별 없는 세대」에는 전후의 폐허를 마주한 청춘의 비애와 희망이 강렬하게 담겨 있다. "우리는 만남도 없고, 깊이도 없는 세대다. 우리는 행복도 모르고, 고향도 없고 이별마저도 없는 세대다. 우리의 태양은 희미하고, 우리의 사랑은 비정하고, 우리의 청춘은 젊지 않다."

보르헤르트의 글은 독일인들의 자각과 반성을 이끌었다. 보르헤르트가 사망한 1947년, 독일에는 '47그룹(Gruppe 47)'이라는 젊은 문인 단체가 결성됐다. 여기에 참가한 작가와 비평가들은 청소년기에 제2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공유한 세대였다. 이들은 반나치주의와 인도주의를 내세우면서 독일 문학의 새로운 출발을 선언했다. 47그룹의 작가 하인리히 뵐과 귄터 그라스는 훗날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보르헤르트의 통렬한 비애는 전후 독일 문학의 견고한 주춧돌이 됐다.

이정현 평론가 | 더스쿠프
21cbac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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