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미술래잡기] 노벨미술상이 있다면

2024. 10. 18.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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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기생충 등 K컬처 인기에
세계 미술계도 韓 배우기 분주
미술 작가 중엔 백남준이 으뜸
영상 소재로 새 시대 방향 제시
살구색 모시 두루마기로 감싼
비디오 아트이자 유작인 '엄마'
간결함으로 강렬한 그리움 전해
백남준의 유작 '엄마'.

지난 열흘간 대한민국은 한강, 한강, 한강이었다. 출판사와 인쇄소 직원들이 밤을 새워 책을 찍어낸다는 즐거운 투정이나 헌책방 주인들이 "왜 청계천에서 한강을 찾냐"고 농담을 했다는 이야기도 그저 달콤하게 들렸다. 마침 매일경제가 노벨상 수상 직전에 행한 최근 인터뷰에서 이런저런 큰 상을 받는 부담에 대해 작가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소설을 쓰고 있다 보면 부담을 잊게 된다"고 했으니, 다소 젊은 나이에 너무 큰 상을 받고도 흥분하지 않는 한강 작가는 의연하게 자기 자리에서 일상을 이어가고 있으리라.

노벨문학상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작가의 작품을 번역이란 매개 없이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문학작품 외에도 최근 세계적 관심을 받은 한국 작품에서 우리만 알아챌 수 있는 맛깔스러운 지점을 만날 때마다 유난히 재미있었다. '기생충'에서 "아들, 넌 계획이 다 있구나"라는 감탄이 주던 어이없음, '오징어 게임'에서 선물 투자로 돈을 날린 친구에게 "아, 누구 선물을 얼마나 비싼 걸 산 거야"라고 질문하는 기훈의 순진함, BTS 노래 가사가 "우리는 아직 젊고 어려 걱정 붙들어 매"로 끝나는 문장이라 드러나는 패기.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사람만이, 한국어에 능통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이런 소소한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돌아볼 기회다. 이리저리 치이며 살아내야만 해서 급해지고 독해지고 영악해진 우리 삶을 자주 자조하지만 그런 모습조차 번역가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바득바득 알고 싶어하는 이가 많은데, 우리는 이미 너무나 쉽게 좋은 문화를 누릴 수 있음을 고마워할 때다.

미술계도 한국을 공부하느라 여념이 없다. 노벨미술상은 없지만 그에 버금가는 중요한 전시를 개최한 한국 미술가들이 이제는 너무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가 힘들다. 그래도 만약 노벨미술상이 있었고, 그 상을 꼭 받았어야 할 우리 작가를 꼽는다면 세계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긴 20세기 비디오아트의 선구자 백남준일 것이다. 음악과 미학을 공부한 백남준은 1960년대 초 개발된 휴대용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미국·유럽·아시아를 오가며, 이제 겨우 사람들의 삶에 스며들기 시작한 '영상'을 물감이나 석고 대신 미술의 재료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면서 새로운 사회에 걸맞은 예술의 방향을 제시했다. 특히 그가 수십 년 전에 제안한 '정보 고속도로'는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온라인 세상을 예견한 것이었으며, 동서양이나 장르 간의 경계 등을 허물며 다원주의 융합예술을 이끌었던 그의 시각은 지금 보아도 전혀 낡아 보이지 않는다.

이미 당대에 최고의 전위 미술가로 추앙받은 백남준은 2006년 73세의 다소 아쉬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후 그의 마지막 유작이 공개되었다. 제목은 '엄마'. 어린 소녀들이 놀면서 가끔 엄마를 찾는 영상이 돌아가는 모니터를 고운 살구색 모시 두루마기가 감싸고 있는 형식의 비디오 조각 작품이다. 파격적인 실험작으로 모두를 놀라게 하며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닌 화려한 예술가였던 그가 마지막에 만든 작품이 '어머니'도 아닌 '엄마'를 향한 그리움이었다는 점도, 이전 어머니들이 곱게 꾸미고 나갈 때 입었을 법한 두루마기의 의미를 극도의 간결함으로 보여준 그의 선택도 놀랍기 그지없었다. 외국인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저런 빛깔의 두루마기를 보았을 때 우리가 단번에 느끼는 단아함을 보여주고 떠난 대가의 유작이 한국인 모두에게 주는 선물 같아 매우 고마웠던 당시 기억이 생생하다.

오랜 기간 우리는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면서 점점 커지는 숫자로 남부럽지 않은 부유한 나라가 되는 일에 몰두했고 충분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제는 좀 더 내실을 다질 여유를 부려보는 건 어떨까. 좋은 책을 읽고, 좋은 영화와 미술을 보고,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 방법을 고민해보는 것만으로도 쉽게 마음의 부자가 될 수 있다. 한강 공원을 산책하고 한강의 소설을 읽는 삶. 우리 주위에 널브러진 우리 문화가 이미 이렇게나 훌륭한데, 진정한 의미의 '한강의 기적'은 훨씬 수월하게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이지현 OCI미술관장(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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