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하는 사정[시평]

2024. 10. 18.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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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란 소설가
병원에 한 달 동안 입원한 엄마
딸 다섯이 온전히 돌보지 못해
엄마를 보며 죽음에 대해 생각
마지막을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스스로 삶 꾸리지 못하게 되면
어디론가 보내져야 할 우리 운명

록 밴드 산울림의 7집 앨범에 ‘노모’라는 노래가 있다. ‘창백한 얼굴에 간지러운 햇살 주름 깊은 눈 속엔 깊디깊은 적막 말없이 꼭 감은 님의 푸른 입술을 나의 뜨거운 눈물로 적셔드리오리다’라는 가사로 시작한다. 노랫말에 나오는 ‘님’은 제목이 가리키는 대로 어머니이다. 그걸 두고 나중에 누군가 혹독하게 비판했다. 감히 어머니를 ‘님’이라고 부르다니! 앨범이 발표된 건 1981년.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이토록 절절한 표현이 불경(不敬)이란 굴레를 뒤집어쓰곤 했다. 솔직하고 자극적인 노랫말에 익숙한 청년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 믿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걸출한 아티스트의 시대를 앞서간 감각이었다고 해 두자.

2024년에 굳이 이 일화를 끌고 온 것은 최근 나에게 벌어진 일 때문이다. 저 노래가 자꾸 입안에서 맴돌았다. 꿀꺽 삼켜보아도 신 침이 솟아나듯 노래는 입안 가득 고였다. 문태준 시인의 절창 ‘가재미’처럼 병상에 누운 노모를 애면글면 지켜보노라면 나도 모르게 자꾸만 저 노래에 지고 마는 것이다. ‘님’이란 단어를 가만히 중얼거리다가는 노랫말에서처럼 뜨거운 눈물이 차올라 말없이 눈을 꼭 감아보기도 하고.

사전에서 ‘님’(임)을 찾아보면 ‘사모하는 사람’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다시 ‘사모하다’를 찾아본다. ‘①애틋하게 생각하고 그리워하다, ②우러러 받들고 마음속 깊이 따르다’라고 풀이되어 있다. 의미를 충족하는 대상으로 어머니를 능가하는 존재가 있을까 싶다. 하나 마나 한 이야기로 아까운 지면을 낭비한다고 혀를 차시려나. 공적인 지면에서 이토록 사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아도 되는 걸까, 마음에 걸린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개인적인 사정이 있을 테고, 그것들이 삶을 형성하고 지탱한다는 생각으로 조금 더 써 보려 한다.

어머니는 한 달 넘게 병원 신세를 지면서 숨 가쁜 날들을 지나고 다행히 퇴원해 집으로 돌아오셨다. 위중했던 상태를 넘긴 지금, 딸들은 놀란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키는 중이다. 그동안 벌어진 일들을 복기해 본다. 다섯 딸 중 첫째는 본인의 건강 문제로 거주하는 외국에서 오지 못했고, 역시 외국 거주 중인 둘째는 번개같이 날아왔으나 축 늘어진 어머니를 부축하고 보살피느라 갈비뼈에 금이 갔다. 응급실로 모시던 중 스르르 무너지는 어머니를 부실한 무릎으로 지탱하던 셋째는 다음날부터 휠체어를 타다 급히 수술을 받고 목발 신세를 지고 있다. 넷째인 나는 멀리 사는 관계로 병실에 들어가면 최대한 오래 머물다 돌아왔고, 급한 일을 해치운 다음 곧 다시 내려가곤 했다. 그러느라 계획된 일정을 취소하거나 미루었는데, 미룬 일정들이 속속 돌아오는 탓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가까이 사는 막내 역시 고령의 아버지를 돌보며 병실 당번을 교대하느라 얼굴이 반쪽이 되었다.

요컨대 어머니가 낳고 키운 다섯 딸 모두의 힘을 합해도 어머니 한 분을 온전히 돌보지 못하는 것이다. 남들이 그렇게 부러워한다는 딸부잣집인데도 사정이 이러하다. 몸은 몸대로, 마음은 마음대로 고달프고 애달픈 가운데 일상이 무너지지 않도록 모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은퇴한 첫째를 제외하곤 넷 다 일을 하고 있으니 더욱 만만치 않은 상황. 게다가 각자의 가정도 유지해야 한다. 하루하루가 팽팽한 고무줄처럼 긴장된 날들이다. 느슨할 겨를이 없으니 끊어지지 않도록 세심해져야 한다. 지금까지 부모님은 여러 차례 입원과 수술을 경험했기 때문에 덩달아 우리도 어느 정도 노하우가 생긴 건 그나마 고무적이라고 해도 될까. 그런데도 이번에는 드디어 속절없이 닥쳐올 어떤 마지막을 대비해야겠다는 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언술이 이처럼 실감 나는 때가 있었던가 싶게.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를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1957년 일본에서 발표된 동명의 소설을 기반으로 다음 해 개봉된 영화인데(국내 개봉은 1999년) 여기에 노부모를 죽음의 골짜기에 버리고 오는 풍습이 등장한다. 노모는 버려지기 위해 스스로 치아를 돌절구에 부딪쳐 깨뜨린다. 예상치 못했던 장면이라 헉하고 신음을 내뱉은 기억이 생생하다. 이윽고 아들이 지고 간 노모를 골짜기에 버리고 돌아설 때, 백골이 쌓여 있고 까마귀가 포진한 그곳에 오도카니 남겨진 백발 노모의 모습도 잊을 수 없다. 돌아서던 아들의 참담한 표정도.

그 영화를 최근 또 다른 일본 영화 ‘10년’을 접하고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식량이 모자라 어머니를 내다 버려야 하는 비극이긴 하지만, 동시에 생명의 순환까지 암시하는 ‘나라야마 부시코’와 달리 이 영화에서는 아예 국가가 정책적으로 노인의 죽음을 획책한다. 그것도 돈을 미끼로. 죽으면서까지 돈이 필요한 노인들이라니. 그 돈의 용처는 깊이 생각해 볼 것도 없다. 그 죽음을 안락사라고 불러도 되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라야마 부시코’가 충격적이긴 했으나 죽음 자체가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관념 같았다면 ‘10년’은 완전한 허구인데도 죽음이 대단히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그때 부모님이 젊었고 내가 어렸던 데 비해 이번에는 부모님은 고령에 나 또한 노후를 내다봐야 하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더는 죽음이 나와 전혀 무관한 일인 양 감상에 빠질 수는 없게 된 것이다. 딸을 다섯이나 둔 어머니는 말년에 복이 터졌다는 덕담을 듣고 있지만, 우리 세대는 스스로 생활을 꾸려나가지 못하게 되면 빨리 어디론가 보내져야 할 터이다. 그곳이 영화 속에 등장한 죽음의 골짜기이든, 안락사 침대이든. 현실적으로 지금 이곳에서는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이 될 것이고. 돈이 들겠지.

이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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