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진보 가리지 않고 이념의 ‘뒷배’ 노릇한 우생학 [책&생각]

한겨레 2024. 10. 18.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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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나치는 아리아인의 우월성을 내세우며 유대인 학살에 나섰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민족의 발전과 진보라는 미명하에 우생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퍼뜨렸다.

책은 한센인들에 대한 강제낙태와 단종, 시설 장애인에 대한 강제불임시술 등과 같은 우생학적 폭력도 두텁게 다루지만,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에만 낙태를 허용하는 모자보건법의 여전한 우생학적 조항도 신랄하게 꼬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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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센인들은 오랫동안 강제 격리·단종·낙태 등의 고통을 겪어왔다. 사진은 지난 2017년 2월 한센인 단종·낙태 국가배상 청구소송에서 승소한 한국한센인총연합회와 변호인단이 기자회견을 여는 모습.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우리 안의 우생학
적격과 부적격 그 차별과 배제의 역사
현재환, 박지영, 김재형 엮음 l 돌베개 l 1만9000원

독일 나치는 아리아인의 우월성을 내세우며 유대인 학살에 나섰다. 일본은 90년대까지 유전성 질환이나 한센병 방지를 이유를 2만5천명에게 불임시술을 했는데, 이 중 1만6천여명은 당사자의 동의가 없는 강제 시술이었다.

우생학은 과연 제국주의만의 산물이었을까? ‘우리 안의 우생학’은 식민지 조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안의 우생학, 즉 인간을 ‘적격자’와 ‘부적격자’로 구분하고 부적격자의 출산을 억제하려는 움직임의 역사를 추적한다.

일본의 우생학적 억압과 차별이 워낙 많이 알려져서 식민지 조선은 그 피해자라는 통념이 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민족의 발전과 진보라는 미명하에 우생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퍼뜨렸다. 특히 식민지배라는 국난을 인종 개량으로 헤쳐나가야 한다고 믿었다. 1933년 여운형 등 대표적 조선 지식인 85명은 ‘조선우생협회’를 창립하고, 우량한 아이를 낳기 위한 조건을 교육하고 배우자 선택을 돕는 ‘우생결혼상담소’를 운영했으며, ‘우생’이라는 대중계몽잡지도 발간했다.

조혼이 폐지되고, 여성의 개가가 허용되는 등 여성해방의 이면에도 우생학적 배경이 있었다. 여성이 더 많은 교육을 받고 출산에 적합한 연령으로 발육·성장해야 더 우월한 자녀를 낳을 수 있기에 조혼이 폐지됐고, ‘인종의 번성’이라는 국가적 의무를 이행하도록 하기 위해 여성의 개가를 허용한 것이었다.

책은 한센인들에 대한 강제낙태와 단종, 시설 장애인에 대한 강제불임시술 등과 같은 우생학적 폭력도 두텁게 다루지만,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에만 낙태를 허용하는 모자보건법의 여전한 우생학적 조항도 신랄하게 꼬집는다. 또 정자은행에서 정자를 제공받아 자발적 미혼모의 삶을 선택하는 여성들이 인종, 외모, 학력 등을 살펴본 뒤 정자를 선택하는 모습 역시 우생학적 태도임을 지적한다.

우생학이 계속 살아 숨 쉬는 이유는 우생학이 민족주의, 사회주의, 자유주의, 여성주의와 쉽고 유연하게 결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시대엔 보수의 입장을 대변했지만, 어떤 시대엔 진보에 힘을 실어주기도 하는 등 다양한 이념의 ‘뒷배’로 활용될 수 있었던 게 지금까지 우생학이 뿌리뽑히지 않은 배경이다. 사학자, 의학자, 여성학자 등 8명의 공동 저자의 다학제적 연구가 이런 날카로운 통찰을 이끌어낸다.

책은 ‘우생학=나치즘=거대악’이라는 도식 때문에 우리가 우리 안의 우생학을 외면, 회피해왔다고 지적하면서, ‘우리가 우생사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탈우생’의 출발이라고 주장한다.

김아리 객원기자 a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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