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집에서 통과한 싱글맘의 이유기 [책&생각]

한겨레 2024. 10. 18.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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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돌연한 이별 선언과 함께 어린 딸과 싱글맘의 삶을 시작하게 된 화자는 낡은 4층짜리 건물 꼭대기 층을 거주지로 선택한다.

남편은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며 혼자 살 집을 구해 나갔으나 사실 이 '독립' 비용도 화자에게 빌린 형편이라 양육비는 기대할 수조차 없다.

어머니 역시 남편 없이 홀로 어린 자식을 키웠다(작가의 아버지는 작가가 한 살 때 '내연녀'와 동반 자살한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다). 이제 화자에겐 엄마의 집도 남편과 살던 집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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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영역
쓰시마 유코 지음, 서지은 옮김 l 마르코폴로(2023)

남편의 돌연한 이별 선언과 함께 어린 딸과 싱글맘의 삶을 시작하게 된 화자는 낡은 4층짜리 건물 꼭대기 층을 거주지로 선택한다. 1층과 2층은 카메라 가게, 회계사무소, 뜨개질 교습소 등 다양한 상점이 들어와 있고 3층은 통째로 비어 있으며 엘리베이터도 없이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는 이곳을 살 집으로 선택한 이유는 오직 하나, 빛 때문이었다. 벽마다 창이 있는 이 집은 낮 내내 햇빛이 들어찼고, 붉은색 바닥재 덕분에 빛은 실제보다 더 밝고 따뜻한 기운으로 일렁였다. 화자도 아이도 처음 집을 보러 간 날 이 빛에 반해 다른 불리한 조건들은 따져보지도 않고 둘만의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싱글맘의 삶은 녹록지 않다. 작가가 1947년생 일본 여성이고 작품이 발표된 해가 1978년에서 1979년 사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혼한 여성이 직장에 다니며 홀로 어린 딸을 키우는 일이 지금보다 몇 곱절이나 힘든 일이었을지 짐작조차 어려울 정도다. 남편은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며 혼자 살 집을 구해 나갔으나 사실 이 ‘독립’ 비용도 화자에게 빌린 형편이라 양육비는 기대할 수조차 없다. 홀로 사는 어머니에게 신세를 지는 것은 영 내키지 않는다. 어머니 역시 남편 없이 홀로 어린 자식을 키웠다(작가의 아버지는 작가가 한 살 때 ‘내연녀’와 동반 자살한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다). 이제 화자에겐 엄마의 집도 남편과 살던 집도 사라졌다. 집을 잃은 사람은 스스로 집을 찾아야 한다.

소설은 싱글맘의 씩씩한 운명 개척기로 흘러가지 않는다. 아빠의 부재를 불안과 분노 발작으로 드러내는 딸을 버거워하고, 남편이 돌아와 주길 은근히 바라기도 하며, 밤늦게 거리를 배회하며 술을 마시고 돌아와 늦잠을 자는 바람에 직장 동료들과 딸의 어린이집 교사에게 비난받기도 한다. 딸이 죽는 꿈을 꾸면 무의식적으로 딸의 죽음을 바라는 게 아닐까 두려워하고, 이웃집 남자를 유혹하기도 하며, 남편이 돌아오길 바라는 동시에 남편이 찾아올까 두려워한다. 이혼 조정 중인 화자는 이런 자신에게 과연 엄마의 자격이 있을까, 자격 없는 엄마로 몰려 양육권을 뺏기지는 않을까, 끝없는 자기검열에 시달린다. 언뜻 보면 화자의 행위는 모순투성이다. 이혼과 독립을 원하는지 아닌지, 남편이 돌아오길 바라는지 아닌지 확실치도 않다. 심지어 딸을 사랑하는지 아닌지조차 헷갈리는 진술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이런 혼란의 상태야말로 이혼과 독립으로 가는 ‘이유기’를 현실적으로 그려내 소설에 리얼리티를 부여하는 장치가 된다.

빛의 집으로 이사하고 일 년 만에 이혼이 확정된다. 화자는 남편의 성을 떼어내고 이전 성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다. 이혼 ‘이유기’를 거치며 화자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애착을 끊어내야 이유기를 통과할 수 있는 것처럼 화자는 빛에 기댔던 마음을 끊어내면서 비로소 어떤 미련과 작별한다. 빛이 가득 고여 있는 집을 떠나 ‘햇빛이 잘 들어오지 않아 썩 좋은 집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집으로 이사를 결행한다. 화자가 그사이 조금은 단단해졌다는 증거일까? 빛에서 어둠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선택에는 언제나 용기가 필요한 법이니까.

이주혜 소설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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