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2030] 엄마의 냉장고, 아이의 냉장고
5년 전 엄마가 돌아가신 후 한동안 냉장고 문을 잘 열지 못했다. 하나씩 꺼내 데워 먹으라고 동그랗게 얼려 놓은 불고기, 볶음밥이라도 해 먹으라고 손질해 놓은 채소, 잘 상하지 않는 장조림과 깻잎조림, 그리고 여러 밑반찬이 냉장고에 있었다. 더 이상 나를 반겨줄 수 없는 엄마 대신 냉장고 속 음식들이 “밥은 먹었니?” 하고 묻는 것 같았다. 엄마의 흔적들이 없어지는 게 아쉬워 냉장고 문 열기가 겁났다. 하지만 음식을 상하게 둘 순 없어서 되도록 천천히 오랫동안 나눠 먹었다. 그렇게 냉장고가 다 비었을 때 비로소 작별을 실감했다.
혼자가 되고는 집에서 밥을 잘 해 먹지 않았다. 물과 술, 냉동만두 따위의 음식들로 냉장고를 채웠다. 배달 앱을 켜 최소 주문 금액이 적고 배달료가 싼 식당을 찾아 아무거나 시켜 먹었다. 배는 불렀지만 속은 공허했다. 막 조리를 마친 따뜻한 음식이 배달됐으나, 식탁에는 더 이상 집밥의 온기가 주는 안정감이 없었다. 허기를 달래고 플라스틱 배달 용기를 씻어 쌓아두는 일상이 반복됐다.
결혼하고 이사 가면서 20년 넘게 쓴 엄마의 냉장고를 버렸다. 수거 신청하고 냉장고를 비운 날 아무것도 들지 않은 텅 빈 냉장고를 한참 바라봤다. 아주 오래전 이 양문형 냉장고가 우리 집으로 처음 들어온 날 기뻐하던 엄마 모습이 떠올랐다. ‘먹을 게 뭐 있나’ 습관적으로 열어보던 냉장고 손잡이가 닳아 있었다. 냉장고를 버린 날 ‘엄마의 세상’은 사라졌고, 냉장고가 놓여 있던 주방 한편 공간은 거실만큼이나 넓어 보였다.
맞벌이인 우리 부부는 결혼하고서도 밖에서 끼니를 해결하거나 배달 음식을 자주 시켜 먹었다. 냉장고는 처가 다녀온 날만 주로 채워졌다. 그러다 냉장고를 제대로 채우기 시작한 건 아이가 태어난 후부터다. 이유식을 만들기 위해 당근과 애호박, 파프리카, 양배추 등 매주 다른 채소를 사 채소 칸에 담았다. 안심이나 우둔살 같은 지방 적은 소고기가 냉동실을 차지했다. 재료를 손질하고, 물을 끓이고, 삶거나 익힌 것을 믹서에 갈아 큐브 모양으로 얼린 뒤 끼니때마다 하나씩 꺼내 데워 아이를 먹였다.
돌이 지나고 유아식을 시작한 최근에는 무염(無鹽) 식단을 짜고 음식을 만들고 있다. 간 소고기와 양파, 당근, 셀러리를 볶아 멸균 우유와 아이용 치즈를 넣어 리소토를 만들기도 하고, 계란을 풀어 파프리카와 버섯을 넣고 오믈렛을 만들기도 한다. 세 끼를 다 챙겨야 하는 주말에는 요리와 설거지를 세 번 반복하면 하루가 끝나 있다. 대신 고소한 음식 냄새, 물 끓인 냄비와 밥솥의 열기가 만들어낸 집밥의 온기가 종일 집안을 채우고 있다.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아이는 온 집안을 헤집고 다니는데 특히 냉장고 문 여는 걸 좋아한다. 서랍형 냉동실 제일 아래칸이 자기 칸인 걸 아는 건지 그 칸을 열어 얼려둔 자기 밥을 꺼내면서 논다. 한눈판 사이 아이가 냉장고 문을 또 열고 놀던 어느 날 나는 ‘냉장고의 주인’을 생각했다. 채우는 것은 우리 부부지만 채워진 것은 대부분 아이의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엄마의 냉장고로 생각했던 낡은 양문형 냉장고도 사실은 나의 냉장고가 아니었을까. 아이를 안아 들어 올리고 냉장고 문을 닫는데 눈이 시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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