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의 창]‘5만전자’와 십상시, 그리고 뉴삼성의 딜레마
2009년 늦가을 마침내 애플 아이폰이 국내에 상륙해 삼성의 혼쭐을 빼놨다. 2010년엔 지펠 냉장고가 돌연 폭발해 사상 최대 21만대 리콜에 나섰다. 그즈음 반도체공장 산재를 다룬 ‘반올림’ 갈등도 불거졌다. 2년여 만에 다시 삼성을 맡았을 때는 불산가스 누출로 하청노동자가 숨졌다. 또 2년여 만에 돌아온 2016년엔 갤럭시노트7 폭발까지….
모두 삼성 출입기자로서 겪은 일들이다. 돌이켜보니 삼성이랑 참 ‘연’이 질기다. 사실 삼성에 ‘위기’ 아니었던 적이 없다.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성패를 갈랐을 뿐.
이건희 회장 생전인 2009년 이명박 대통령이 연말에 사면복권을 단행했다. 곧 ‘떡값검사’ 뇌물공여 X파일 사건 등으로 물러난 이 회장의 경영복귀 신호였다. 시민사회의 비판이 들끓었다. 다만 난 좀 다른 판단을 내렸다. 그의 복귀는 일면 타당하다는 메시지를 냉정히 담았다. 이유는?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가 아니다. 바로 아이폰 3GS다.
직전까지 LG 초콜릿폰과 함께 ‘연아의 햅틱’으로 저 거대한 항공모함 노키아를 반쯤 격침시킨 삼성은 기세등등했다. 사실은 코앞에 빙산이 다가왔는데도 말이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반파당해 침몰 직전 상태였다.
이건희 회장의 진두지휘가 없었더라면 ‘홍길동폰’(쇼옴니아)이란 수모까지 견뎌 지금의 갤럭시폰은 되지 못했을 거다. 1995년 삼성 구미사업장에서 애니콜 등 불량품 15만대를 전량 폐기한 ‘화형식’ 정도의 결기가 때론 필요하다. 아니면 단기성과에 급급한 월급쟁이 사장과 다를 게 뭔가.
애니콜부터 지펠, 갤노트, 불산, 반올림과 최근 반도체 논란까지 관통하는 공통분모는 뭘까. 바로 원칙 내지 기본기다. 그걸 지키지 않은 채 누적됐을 때 끝내 곪아 터지기 마련이다. 이건 ‘마누라랑 자식까지 다 바꾸더라도’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할 철칙이다.
요사이 삼성 반도체 위기설이 파다하다. 그러나 외부인은 파운드리가 어떻고, HBM이 저떻고는 대충 퍼즐만 맞춰보는 정도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기자들은 종종 “청와대, 국정원은 취재 가능해도 삼성의 내막은 알아낼 수 없다”고들 한다. 어쨌거나 세상 사람들이 “삼성은 위기”라고 떠드는 거야말로 적어도 위기의 전조다. 우리의 ‘제일주의 삼성’이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과연 3세 경영세습에 정력을 허비해서일까.
근래 파운드리, HBM 문제를 아우르는 특징이 있다. 두 사업에서 삼성이 보기 드물게 ‘을’이란 사실이다. 삼성도 더러 을인 분야는 있다. 하지만 세상에선 보통 ‘갑 같은 을’이라 부른다. 그러나 파운드리와 HBM에선 고객사 입맛에 맞춰줘야 하는 ‘찐을’을 겪는 중이다. 삼성에는 도전거리다.
이건희 회장 체제에선 ‘월화수목금금금’ 근무를 자랑처럼 여겼다. 양의 축적을 통한 질적 변화를 추구하는 ‘패스트 팔로어’(빠른 추격자) 전략이 먹혔다. 이제 그이의 유훈인 ‘창조경영’은 예전과는 완전 다른 방식을 요한다. 단지 호칭·직급 파괴, 출퇴근·복장 자율화 정도로는 담보하지 못한다. 그간의 조직문화를 갈아엎어야 할 수도 있다. 현장기자 때 애플·구글과 비교하며 삼성을 그토록 비판했지만, 돌아보니 과욕이었다. 세계를 호령하는 미국의 빅테크 ‘M7’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히피문화에 기반한 자유와 창의 위에 비로소 꽃피우고 열매 맺은 것들이다.
최근 여기저기서 전현직 삼성 반도체맨의 심경 토로가 이어진다. 예컨대 D램 메모리 성공 경험을 잣대로 상명하복식으로, 너무 세세한 부분에 책임을 따지니 일을 못하겠다는 원성이 들린다. 타사나 해외로 간 이들은 개발을 마음 놓고 할 수 있어 너무 좋다고도 한다. 이재용 회장은 주위를 조용히 물린 채, 전직 삼성맨들을 만나 날것 그대로의 쓴소리부터 들어보고 실마리를 찾길 바란다.
특히 곁에 노회한 ‘십상시’가 있다면 과감히 내쳐야 한다. “걱정 마십시오. 전문가인 제가 다 알아서 잘 챙기고 있습니다” 따위의 감언이설에 넘어가선 안 된다. 연말 인사 때 읍참마속 심정으로 ‘임원은 100% 제로베이스’로 재세팅해야 할 것이다. ‘최고수뇌부의 용단’까지도 포함해서 말이다. 이미 이재용 회장은 2020년 5월 ‘뉴삼성’을 선언하며 4세 경영승계는 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앞뒤 잴 것도 없다. 젊은 직원을 믿고 더 과감한 세대교체를 내보여야 할 때다.
이 보잘것없는 땅에서 우리가 가진 건 인재뿐이다. 삼성전자 핵심 인력이 미국, 대만, 일본 등지로 빠져나간다면 내일은 더 흐리고 폭풍우마저 몰아칠 것이다.
전병역 경제에디터 junb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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