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페로 보는 시선]소리 없이 흩어지는 이름들

기자 2024. 10. 17.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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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성’ 쌓는 이스라엘·하마스·헤즈볼라의 ‘성전’
일본 오키나와 구해군사령부에 놓인 동전들이 이름 없는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레나

오키나와 도미구스쿠 언덕에 오르면 오키나와 구해군사령부(旧海軍司令部壕)가 있다. 이 건물은 일본군이 지은 반원형의 지하 벙커로, 오키나와 전투의 거점이었던 장소다. 폭이 좁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면 지하 30m 아래에 좁고 낮은 방들을 볼 수 있다. 벙커 내부에는 패전을 직감한 해군 장교들이 수류탄을 이용해 집단 자살을 한 흔적이 남아 있다. 그들의 죽음은 누구의 선택이었을까.

오키나와 민간인들 또한 일본군에게 강제, 반강제로 죽임을 당했다. 일본군은 민간인을 차출해 전투에 투입시켰고 숨어 있던 주민들의 은신처와 식량을 빼앗았다. 미군의 포로가 되면 끔찍한 일을 당한다는 일본군의 거짓소문에 속은 수많은 오키나와인들이 가족과 함께 자결을 선택했다.

이름 없는 죽음들은 전쟁에서 집계되지 않는다. 일본 정부는 전쟁의 비극을 알리고 평화를 위한 공간으로 이용하겠다며 벙커 일부를 개방했지만, 출입구 옆에는 일본제국을 상징하는 야마토 전함의 모형이 놓여 있다. 벙커 안 벽에는 당시 사령관이었던 오타 미노루의 편지가 붙어 있다. 편지에는 오키나와 현민이 ‘함께 싸웠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지만 사실 확인은 불가능하고 그들의 진짜 목소리를 확인할 길은 없다. 지하 벙커의 막다른 곳에 쌓인, 방문객들이 놓고 간 엔화 동전들이 무명의 죽음을 애도할 뿐이다. 동전을 놓은 수많은 무명인들은 무명인의 죽음을 슬퍼한다.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죽음을.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1년이 넘도록 지난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 레바논의 헤즈볼라가 하마스와 연합하면서 전쟁이 심화되었고, 이스라엘이 헤즈볼라의 수장 하산 나스랄라를 암살했음을 공식적으로 밝히면서 전쟁은 극으로 치닫고 있다. 수많은 폭격이 반복되고 이름 없는 죽음들이 숫자로 치환된다. 사라져간 수많은 이들의 이름은 어디로 가는가.

인류사에서 전쟁은 끝없이 반복되고, 싸우는 이들은 명분을 말한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헤즈볼라가 ‘성전(聖戰)’이라는 명분을 댈 때, 이름 없는 죽음은 계속 쌓여만 간다. 성스러운 것은 무엇이며, 전사란 이들은 무얼 지키는가? 목적 없는 신념 아래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것은 평온한 일상을 바라는 이들의 생생한 삶이다. 시시각각 셀 수 없는 이름들이 사라지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삶은 21세기의 위령탑, 소셜미디어 속에서 하나의 이름으로 잠시 머물렀다가 이내 흩어진다.

레나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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