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랑 똑같네요”…귀를 열자, 마음이 열렸다

주영재 기자 2024. 10. 17. 21:09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감정노동’ 민원 공무원
단체 상담프로그램 가보니
지난 15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진행된 ‘마음 바라보기 주간’ 민원공무원 대상 단체 상담에서 참가자들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인사혁신처 제공
5~6명씩 팀 이뤄 보드게임 ‘딕싯’
자신의 고민 꺼내 보이고 속풀이
어려움 견디게 하는 ‘자원’ 묻자
아이·어머니·포기·여행 등 꼽아
“비슷한 고충 공감…신선한 재미”

“민원 일이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막상 마주하니 더 어렵더라고요.”

지난 15일 정부세종청사 중앙동에서 민원공무원을 대상으로 한 단체 상담프로그램이 진행됐다. 공무원의 마음건강을 관리하기 위한 ‘마음 바라보기 주간’ 행사의 하나이다. 참가자는 대부분 각 부처의 저연차 민원 담당 공무원이었다.

이날 행사에 참가한 최진식씨(37)는 고용노동부에서 실업급여 심사를 담당한다. 업무에 대한 뿌듯함은 크지만, 상담 과정에서 수급 자격을 얻지 못한 이들의 반발심을 견디는 게 쉽지 않았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생길 듯했다.

최씨와 같은 민원, 재난 대응 공무원의 감정노동과 트라우마는 공직 사회의 큰 고민거리이다. 공무상 자살 순직 건수는 2018년 8건에서 2022년 22건으로 늘었고, 과로·직무 스트레스로 인한 공무상 사망자는 같은 기간 78명에서 109명으로 늘었다. 공무상 정신질환으로 인한 요양자 수는 1만명당 2.14명으로 산업재해(0.19명)보다 약 11배 높다.

예방책이 필요하다는 요구에 지난 8월 ‘범정부 공무원 재해예방 종합계획’이 마련됐다. 건강진단 확대, 긴급직무휴지제도 도입, 방문 상담 지원 등과 함께 마음바라보기 주간이 재해예방 체계 구축 방안으로 포함됐다.

올해 1회를 맞은 마음 바라보기 주간은 10~20일 서울·세종 등 전국 9개 정부청사에서 진행된다. 이날 열린 단체 심리상담 프로그램을 포함해 경복궁 달빛 산책, 그림책 치유, 정오의 호흡명상 등 공무원의 마음 안정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단체 상담은 고해성사하듯 고민을 털어놓고, 눈물을 쏙 빼는 상담은 아니다. 5~6명이 팀을 이뤄 보드게임 ‘딕싯(Dixit)’을 한다. 딕싯은 심리학자가 고안한 그림을 통한 이야기 만들기 게임이다. 게임 참가자는 각각 6장의 그림 카드를 받은 후, 돌아가면서 ‘이야기꾼’이 된다.

상담사들이 진행자가 돼 이야기꾼이 말할 주제를 정해준다. 이날 첫 주제는 ‘최근 자신을 힘들게 했던 일이 무엇이냐’였다. 이야기꾼은 자신의 고민을 문장이나 단어로 말하고, 이야기꾼과 다른 참가자들은 자신이 들고 있는 그림 카드 중 그 상황과 가장 들어맞는 카드를 제출한다. 각자 제출한 카드를 섞은 후 이야기꾼이 내놓은 카드를 맞히면 점수를 얻게 된다.

‘역마살’을 시작으로 ‘고립감’ ‘견뎌내기’ 등 주로 단어로 제시됐다. 한 참가자는 ‘왜 이 카드를 냈는지 이유를 설명해달라’는 상담사의 말에 “조현병이 있는 민원인이 자주 찾아오는데, 올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말했다.

다른 참가자는 “전임자가 일을 제대로 처리해놓지 않은 채 넘겨줬는데 민원인의 악담은 내가 받고 있어서 괴롭다”고 했다. 민원인에게 내용을 설명하면 무조건 공문으로 만들어서 보내라는 분이 있다고도 했다.

최씨는 “함부로 줄 수 없는 돈이고, 자격이 되어야 하는데, 막무가내로 요구하는 분들이 있다”면서 “아무리 설명을 드려도 같은 말을 반복하는 분들이 있어서 힘들다”고 말했다.

다음 주제로 어려움 속에서도 견디게 하는 ‘자원’은 무엇인지 물었다. 참가자들은 ‘아이’ ‘어머니’ ‘따뜻함’ ‘포기’ ‘이야기’ 등을 꺼냈다. ‘여행’이라고 말한 참가자는 손에 쥔 카드 중 전구 안에서 빛나는 양초를 바라보는 소녀가 그려진 카드를 내놨다. “일 년에 한 번 여행을 가는데, 그때만 바라보고 버티고 있어요. 양초를 소중히 바라보는 소녀의 모습이 잘 들어맞는 거 같아서 선택했다”고 말했다.

각자가 이야기꾼이 되어 특정 키워드를 떠올린 이유, 특정 그림 카드를 선택한 이유를 말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처지와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림을 통해 설명하니 자연스럽게 속내를 털어놓게 된다.

최씨는 “민원 업무를 보는 공무원들이 비슷하게 고충을 갖고 있구나라고,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좋았고, 심리검사 게임도 굉장히 신선하고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이날 상담에 참가한 연원정 인사처장은 “공무원들이 걱정 없이 일할 수 있도록, 마음 건강을 살뜰히 살피겠다”고 말했다.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