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단 불꽃’ 원은지 “플랫폼 압박 빠진 ‘딥페이크 처벌법’ 아쉽다” [차 한잔 나누며]
“수사 협조 기준 등 아직 없어
약속, 선언적 수준 그칠 수도
사업자 책임 묻는 법안 나와야”
국내에서 ’텔레그램 딥페이크 성범죄’ 사태가 공론화된 지 한 달 반 정도가 흘렀다. 딥페이크 성착취물을 소지·시청만 해도 처벌하는 성폭력범죄처벌특례법 개정안(딥페이크 성범죄 처벌법)이 지난 16일부터 시행됐다. 범죄 현장이자 유통 창구가 된 플랫폼 텔레그램으로부터 한국 정부는 △딥페이크 등 기술을 악용한 불법정보 무관용 삭제 △핫라인 개설 및 실무자 협의 정례화 등의 약속을 받아냈다. 수사 당국에 협조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던 텔레그램이 가해자 정보를 제공한다면 이는 중대한 변화다.
현장에서는 이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정부가 더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등을 ‘추적단 불꽃’ 원은지 대표에게 물었다. 원 대표는 N번방 사건(2019년)을 세상에 알린 것을 시작으로 엘 사건(2022년), 서울대 딥페이크 불법합성(2024년) 등 텔레그램 기반 디지털 성범죄를 수년째 추적 보도해 온 반(反) 성착취 활동가다. 지난 11일 경찰청 국정감사 현장에 참고인으로 출석하기도 한 그는 5년째 제자리걸음인 경찰의 소극적인 수사를 지적하며 감정이 복받친듯 울먹여 장내를 숙연케 했다.
원 대표는 “국민들로서는 내가 이런 피해를 받았는데 이 사람 정보를 텔레그램에서 정말 줄 것인지가 궁금하지 않겠느냐”며 “예를 들어 시청만 한 사람도 정보를 줄 것인지, 소지자나 제작자만 줄 건지 등 기준을 텔레그램이 밝혀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런 논의를 하는 주체가 불분명하고, 수사 협조 기준 같은 것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는 선언적 수준에 머물 수 있다는 지적이다.
현실적인 해결책이 되려면 “과태료나 강력한 법적 근거에 의해 텔레그램을 압박할 무기”가 필요하고, “부가통신사업자에게 책임을 물을 법안이 필요한데 이번에 통과된 이른바 ‘딥페이크 성범죄 처벌법’에 이는 포함되지 않아 아쉽다”고 원 대표는 말했다.
◆텔레그램 성착취 생태계 방치한 사회
텔레그램 안에서 성착취물은 ‘재화’로 여겨지면서 무한히 확대 재생산되는 구조라고 원 대표는 설명했다. 그가 파악한 텔레그램 성착취 생태계는 3단계로 나뉜다. 맨 위에 성착취물 제작자, 중간에는 소지자들 및 방 운영자들, 가장 하단에는 시청만 하는 이용자들이 있다.
원 대표에 따르면 2019∼2020년 한 차례 성착취물 제작자들이 잡힌 뒤 한동안 ‘새로운 자료’를 만들 이들이 사라지자 이 생태계는 잠시 축소됐다. 그러다 지난해 초부터 ‘좋아하는 여성의 사진을 올리면 옷을 벗겨 드립니다’ 류의 인공지능(AI) 딥페이크 불법합성봇들이 우후죽순 등장했다. 원 대표는 이를 보며 “봇들을 이용해서 이제는 누구든 제작자가 될 수 있는 구조로 와 버린 것을 알았다”며 “그렇게 텔레그램 성착취 생태계가 다시 커졌다”고 분석했다.
도구를 쥐자마자 불법 합성물 제작에 뛰어든 이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잡히지 않는다는 것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N번방을 겪은 후에도 경찰이 ‘디지털 성범죄와의 전쟁’ 같은 강력한 메시지를 주지 않았던 영향이 컸다. 특히 이번 딥페이크 사태에서는 “경찰 조사에서 ‘사진 합성이 왜 성범죄인지’ 피해자들에게 물어봤다는 보도 등이 나오면서 가해자들도 ‘피해자를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별 일 없을 거라고 안도한 것”이라고 원 대표는 말했다.
과거 N번방 등에서 주요 제작자 소수만 검거한 채 유야무야 끝난 경찰의 감시망은 이번 ‘딥페이크 대량 포르노 제작 사태’를 가능케 한 주 요인임을 부정할 수 없다. 당시 26만명에 달했던 성착취방 이용자들이 대부분 처벌받지 않고 빠져나갔고, 그들 중에 결국 새로운 ‘제작자’로 돌아오는 이들이 생겼다. 이 자료를 소비하러 성착취방에 들어온 이용자는 N번방 때와 비슷한 수준인 22만명에 이르렀다.
원 대표는 2022년 호주에서 아동청소년 성착취 혐의로 검거된 엘(L)의 사례를 소개했다. 먼저 일어났던 N번방 사건 때 텔레그램에서 수법을 습득한 엘이 유사한 방식으로 성착취를 저지른 것이었다. 엘은 추적단 불꽃을 사칭해서 “텔레그램 안에 너의 신상 정보가 유포되고 있다”며 미끼를 던져 피해자를 낚은 뒤 성을 착취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처음에는 단순히 텔레그램 안에서 시청만 했던 사람일지라도 나중에는 본인이 직접 불법합성물 대화방을 운영하기도 하고, 직접 제작자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텔레그램에 오는 이들이 계속해서 새로운 자료를 원하는 것이 공통된 정서이기 때문에 성범죄 피해물들은 이 안에서 확대 재생산될 수 밖에 없습니다.”
직접 잠입해서 본 텔레그램 방들은 범죄 혐의별로 나뉜다기보다 온갖 불법 영상들이 한데 모이는 ‘대규모 자료관’이었다. 아동청소년 성착취물부터 성관계 불법촬영물, 딥페이크 불법 합성물까지 다양하게 올라오기 때문에 “한번 그 성착취 생태계에 발을 들이면 모든 유형의 범죄 자료를 다 볼 수 있는 구조“다.
끊임없이 새로운 성착취물을 찾고, 점점 더 큰 자극을 원하는 이들은 서로가 끈끈한 공범이 돼 범행을 발전시켜나갔다. 단순히 콘텐츠를 내려받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형태가 되면서 더욱 재밌는 놀이로 진화한 셈이다.
원 대표는 “이들이 성착취물, 소위 ‘자료’를 볼 때 중요한 포인트는 현실에 존재하는 살아있는 여성이냐 하는 점”이라며 “그래서 피해 여성의 신상 정보나 사는 지역을 함께 올려서 그걸로 뭉치는 방을 따로 만든다”고 설명했다. 지인이 겹치는 이들끼리 모이는 ‘겹지방’의 실체가 그것이다. 이곳에서는 피해 여성을 아는 남성들끼리 피해자에 대한 품평을 하거나 그의 일상을 공유하는 식으로 대화를 이어나간다.
텔레그램 수사 기법이 N번방, 박사방 사건 이후 훨씬 더 발전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한 점도 뼈아프다. 원 대표에 따르면 텔레그램 수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장 수사관이 전국적으로 30∼40명뿐이다. 이들을 더 많이 늘렸어야 했고, 수사기관의 전문 교육도 더 필요했다. 조주빈 같은 주요 가해자를 잡아들여 42년형을 받았다고 하니 수사 당국도 사회도 ‘이제 이런 디지털 성범죄가 없겠다’고 안일하게 생각한 측면이 컸다.
원 대표는 기자 지망생 시절 2019년 여름 뉴스통신진흥회에서 주최한 탐사보도 공모전에서 N번방 실체를 밝혀 1위를 수상했다. 디지털 성범죄에 특화된 활동가이자 프리랜서 기자로서의 삶이 그렇게 시작됐다.
“그때는 5년 동안 이러고 있을 줄 몰랐는데 기사 제출하던 날 무력감이 많이 들었습니다. 이게 세상에 공개된다고 피해자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싶었기 때문에요.”
텔레그램 실태를 막 마주했을 때였지만 이미 이곳은 성착취물의 온상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제작자를 잡는다 해도 “핵폭탄을 터뜨리지 않는 한 대화방이 완전히 없어지긴 힘들겠다”고 생각했다는 그는 ”피해물을 보려는 가해자들과 피해물이 끝없이 재생산되는 구조가 한몸처럼 움직이고 있음을 파악했다”고 했다.
5년째 지켜보는 범죄 현장은 늘 무력감을 안기지만 그렇다고 활동을 계속하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 원 대표는 “그래도 N번방 등 과거에 기록한 것을 다른 언론이 취재할 때 도움이 되도록 제공한다거나 수사에 도움이 되게 하고, 정치인들에게 강력하게 말할 현장의 데이터들이 있다”며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분들에게 제보도 많이 오고, 범죄 현장도 함께 모니터링하면서 변화를 몸소 겪다 보니 무력하게 있는다고 해결될 건 아님을 깨달았다”고 밝혔다.
스트레스 해소법으로 운동, 산책, 귀여운 것들을 많이 보려고 한다는 원 대표는 디지털 성범죄 추적 활동을 계속하는 원동력에 대해 “서울대 딥페이크 사건 피해자인 루마(활동명)님처럼 본인의 피해 구제를 넘어 적극적으로 사회에 도움이 될 방향을 같이 고민해주는 분들을 만난 것”이라고 말했다. 성향을 분석하는 갤럽 강점검사에서 ‘긍정’이 1위로 나오는 성격도 영향을 준 것 같다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묻는 질문에 원 대표는 딥페이크 성폭력과 관련해 옆에 있는 여성들, 피해자들이 갖는 불안과 공포에 귀 기울여 달라고 당부했다.
“인천의 한 고등학교 선생님이 불법촬영 및 불법합성물 피해를 발견하고 경찰에 찾아갔다가 신고 접수를 거부당한 뒤 스스로 가해 학생을 추적한 사례가 있어요. 보고서를 써서 경찰에 갔더니 그제야 접수를 받았다고 합니다.
지금 각자의 자리에서 피해자들이 용기 내 고군분투할 때 사회가 많이 도와줬으면 해요. 예를 들어 이 선생님은 교육청 소속이니까 교육청에서 선생님께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경청할 담당자가 한 명 지정되고, 직장 내에서도 다 같이 보호해주면 좋겠습니다. 범죄를 들여다보는 게 힘들다면 그냥 옆에 있는 여성들과 연대해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정지혜 기자 wisdo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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