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학도 열정 불타는데... 꺼져가는 ‘배움터 등불’ [집중취재]
“제 평생의 한을 풀어준 야학이 문 닫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지난 16일 오후 6시30분께 어둑어둑해진 저녁 무렵, 책가방을 어깨에 메고 한 건물로 들어가고 있는 어르신들이 보였다. 계단을 오르자 ‘수원제일평생학교’라고 쓰인 간판이 걸린 학교가 나왔다. 이곳은 수원특례시 팔달구에 위치한 야학(夜學). 지난 60여년 동안 어르신을 위한 문해 교육, 만학도를 위한 검정고시 과정 교육 등을 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 학생들의 평균 나이는 60~70대. 어릴 적 어려운 환경 등으로 공부의 기회를 놓친 어르신들이 주로 야학을 찾는다.
이날 저녁에도 2평 남짓한 강의실에서 어르신 10여명이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수업을 듣고 있었다. 올해 4월부터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는 이순혜씨(가명·65)는 중졸 검정고시반에 다닌 지 3개월 만에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이씨는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아버지가 아들 앞길 막는다며 중학교 진학을 반대했다”며 “어린 나이에 공장으로 출근하면서 서러웠던 기억이 난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야학에 다니면서 중졸 학력이 돼 자신감을 얻게 됐다”며 “야학이 늘어나 배움의 기회를 얻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러한 바람과 달리 야학 운영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정부나 지자체로부터 지원받는 예산이 거의 없는 탓이다. 그나마 수원제일평생학교는 검정고시 거점기관으로 선정돼 일부 예산을 지원받고 있지만, 월세를 감당하기에도 벅찬 상황이다. 수업은 자원봉사 교사들로 진행하고, 부족한 운영비는 박영도 교장의 사비를 보태 겨우겨우 이어가고 있다. 화성, 의왕 등 인근지역에 사는 학생들의 문의도 많지만 정원이 넘쳐 받을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른 지역의 야학 상황도 마찬가지. 남양주시 화도읍에 있는 ‘남양주 야학’은 임대료가 부담스러워 월 20만원의 사무실을 구해 가벽을 설치, 강의실 2개를 간신히 만들었다. 이곳에 다니는 학생들은 60대 이상 고령 학생 등을 포함해 총 70여명. 단계별로 검정고시반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공간을 쪼개 쓸 수밖에 없다. 박옥순 교사는 “전기요금이 많이 나올까 봐 이번 여름에 에어컨도 못 틀고 수업을 했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에도 경기도내 야학 관계자들은 배움에 대한 열망이 가득한 이들을 위해 근근이 시설 운영을 유지 중이다. 성남에서 ‘행복드림학교’를 운영 중인 윤종일 교장은 “야학에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스스로 배우고자 찾아왔기 때문에 배움의 열정이 누구보다도 크다”며 “경제적 이유 등으로 배움의 기회를 놓친 어르신들을 위해 야학을 살리기 위한 지원과 관심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 재정 보릿고개 ‘야학’… “우리 학교를 지켜주세요”
교육의 기회를 놓친 성인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고 있는 경기도내 야학들이 재정 문제로 운영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지원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17일 전국야학협의회 등에 따르면 야학은 학령기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어르신 등을 대상으로 다양한 교육사업을 무료로 진행하는 비영리 교육단체다. 최근에는 이주노동자나 탈북자 등 사회적 약자들도 이곳에서 배움의 기회를 얻고 있다.
하지만 야학이 재정난으로 만학도들의 배움의 기회가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운영에 큰 도움이 됐던 후원금은 줄고, 물가가 치솟으면서 월세와 공과금은 늘어난 탓이다.
더욱이 야학을 위한 정부 공모사업 예산이 줄어들며 지원금을 받지 못한 야학들의 시름은 더욱 깊어져 가고 있다. 교육부가 검정고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기관(전국 기준)에 지원하는 예산은 2022년 8억4천만원에서 올해 5억5천만원으로 약 34%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글을 읽고 쓰는 것을 가르치는 역할을 하는 야학 등에 지원하는 ‘성인문해 지원사업’ 예산도 감소하는 추세다. 같은 기간 성인 대상 문해교육 프로그램 관련 예산은 52억원에서 49억원으로 줄어들었다. 이마저도 지원 대상이 민간에서 운영하는 복지관과 지방 자치단체가 운영하는 교육프로그램까지 너무나 넓어, 야학이 지원받을 수 있는 예산은 한정적이다.
이 때문에 수십 곳에 달했던 야학이 하나둘 문을 닫으면서 현재 도내 남은 야학은 20여곳에 불과하다.
전국야학협의회 관계자는 “과거에는 한 지자체에 여러 곳의 야학이 운영됐지만, 현재는 야학들이 경영난에 허덕이면서 문을 닫아 한 곳도 없는 지자체도 있다”며 “정부 공모사업과 후원 등이 줄어들면서 어렵게 운영을 이어가고 있는 실정”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정규교육 과정을 거치지 못한 어르신 등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줬던 야학이 사라지지 않도록 정부와 지자체의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교육부 관계자는 “야학 등에 지원하는 사업 예산을 늘리고 있지만 예산 확보 과정에서 삭감됐다”며 “내년도 관련 예산을 증액해서 요청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오민주 기자 democracy555@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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