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난장] 10월, 그 묵직한 역사의 수레바퀴
역사적 평가·피해 보상은 더뎌…항쟁 정신 계승하고 되새겨야
김요아킴 시인·부산 경원고 교사
‘억눌린 우리 역사 / 터져 나온 분노 / 매운 연기 칼바람에도 / 함성소리 드높았던 / 동 트는 새벽벌 / 시월이 오면 / 핏발 선 가슴마다 / 살아오는 십일 육 / 동지여 전진하자 / 깨치고 나가자 / 뜨거운 가슴으로 / 빛나는 내일로.’
지난 16일은 부마 민주항쟁 기념일이었다. 이 글은 당시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부산대 10·16 기념비에 적혀있는 문구다. 글자 행간 사이사이로 느껴지는 그날, 그 시대에 대한 청년 학생의 울분과 결기가 오롯이 되살아 마치 지금 우리에게 전해져오는 듯하다.
1979년, 그 해는 유신정권의 폐해가 극도로 치닫던 정점의 시기였다. 야당과 재야 세력을 비롯한 반정부 인사를 강제로 구금 체포했고, 당시 신민당 김영삼 총재마저 박정희 정권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의원직에서 제명시키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게다가 회사의 부당 폐업에 맞서 신민당사에서 시위를 하던 YH무역 노동자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다 김경숙 여성 노동자가 사망하면서 민중의 인내는 임계점에 다다랐다.
당시 부산대 학생들은 교문 밖 진출을 시도했었는데, 이는 결국 부산 전역에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는 발화점이 되었다. 이튿날에는 대학생뿐만 아니라 시민까지 합세해 수만 명으로 불어나면서 ‘유신철폐, 독재타도’의 구호를 외쳤다. 그리고 18일에는 인근 마산으로까지 이어져 경남대 학생을 중심으로 각계각층의 시민이 동참하는 거대한 항쟁의 불길로 타올랐다.
주목할 것은 시위의 주체가 학생뿐만 아니라 시민이 대규모로 합세하게 된 원인이다. 유신정권의 엄혹한 정치적 탄압도 있었지만, 당시의 경제 상황이 악화 일로로 치달았다는 데 있었다. 2차 석유파동과 더불어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위기와 맞물리면서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과 함께 ‘경제안정화정책’을 수용하며 그 위기를 타개하려 했다. 하지만 경기 침체와 중소기업의 연쇄 부도, 물가 폭등 등으로 박정희식 경제정책이 한계에 봉착했음을 1979년은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중화학공업 위주의 정부 정책으로 인해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대부분인 부산 마산의 불만과 그 피해도 고스란히 한 몫했다.
결국 이러한 부마항쟁은 10·26을 촉발시키며 유신정권의 몰락을 가져왔고, 마침내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 고귀한 정신만큼 지역적, 정치적 역학관계에 의해 역사적으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민주화를 위한 굵직한 동력이 되었던 4대 국가기념일 중 가장 늦게 제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진상 규명도 제때 이뤄지지 못했다.
당시 부마에 계엄령과 위수령이 발동되면서 군인과 경찰에 의해 닷새가량 반인륜적 폭압이 이뤄진 것에 반해 그 피해 규모를 파악하는 속도는 더딘 형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항쟁 당시 주검으로 발견돼 유일한 희생자로 알려진 마산의 유치준 씨가 2019년 정부로부터 공식적인 사망자 인정을 받았고, 부산에서는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평생 폐질환 후유증으로 고통받다 생을 마감한 서회인 씨가 2021년 국가로부터 피해 보상을 받으며 그 한을 풀고 명예 회복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지난 토요일에는 마산문학관에서 부산작가회의와 경남작가회의가 공동으로 주관한 부마 민주항쟁 세미나와 작품 전시회가 열려 그날의 의미를 문학적으로 되새겼다. 회원들이 낭송하는 시를 통해 그날의 정신을 기억하며 또한 문학사적 차원에서 항쟁의 의미와 함께 다양한 증언 및 기록들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는 두 단체의 지회장이 만나 매년 지역을 돌아가며 행사를 개최하자고 합의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작가란 모름지기 현실의 모순에 맞서 올곧은 정신으로 시대의 양심을 지키고 실천해야 할 책무를 가진 이들이라고 할진대 부마는 이런 공동의 역사적 상처와 민주화의 가치를 실현한 곳 그 이상이기에 어찌 보면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
흔히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와 같다고 한다. 누군가의 숭고한 희생 없이는 결코 주어지지 않을 자유와 평등을 우리는 그때 그 수많은 이들에 의해 빚지며 살고 있는 것이다. 이 10월의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오늘을 사는 지금, 우리 시대에 다시 비춰봐야 할 때다. 오늘 아침은 항쟁 당시 국제신문 기자로 시위 행렬에 참가를 했던 고 임수생 시인의 그 절절한 목소리로 시작해 보려 한다.
‘1979년 10월 16일 / 마침내 불꽃은 치솟았다. / 우리들의 불꽃은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 되어 / 거리와 골목 / 교정과 광장에서 / 민중의 손에 들려 / 노동자와 농어민 / 도시 빈민과 진보적 지식인 / 학생들의 손에서 / 거대한 불꽃으로 불기둥 되어 / 하늘을 찌르며 타올랐다.’ (‘거대한 불꽃, 부마 민주항쟁’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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