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이 칼럼] 주치의 제도에 대한 오해와 진실
의료대란이 장기간 지속되자 정부는 대형 병원 대신에 가까운 동네의원 이용을 요청했다. 상급종합병원 등이 전공의 공백으로 기존의 진료량을 유지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대형 병원은 중증질환을 전문적으로 치료하기에 인력·기술·자원이 고도로 집중된 의료기관이다. 그럼에도 중증질환이 아닌 환자들이 많이 방문한다. 의료대란을 계기로 정부도 의료전달체계의 미비로 인한 ‘대형 병원 환자 쏠림 현상’을 뼈저리게 실감했을 것이다.
선진 복지국가처럼 우리도 의료 서비스의 단계적 이용을 의미하는 의료전달체계를 확립해야 한다.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행정적·재정적 수단으로 중증질환자가 아닌 환자는 대형 병원에 갈 수 없도록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네의원들이 매력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양질의 일차 의료 수행기관’으로 재편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전자를 이미 활용하고 있다. 진료의뢰서와 높은 본인부담률 적용이 그것인데, 효과가 미약하다.
선진 복지국가들은 오래전부터 후자인 양질의 일차 의료를 제도화했다. 바로 주치의 제도다. 덴마크 등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영국 등의 중부 유럽 국가들, 이탈리아 등 남유럽 국가들은 모두 주치의 제도를 보유하고 있다. 이들 나라에서 주민들은 질병 예방·치료와 건강의 유지·증진을 위해 주치의를 가장 먼저 찾는다. 지역사회와 환자의 생활 습관·상태를 잘 알고 있는 주치의가 환자-의사 관계를 계속 유지하면서 환자의 필요에 맞게 건강과 질병에 관한 모든 분야를 포괄적으로 책임져주기 때문이다. 이것이 건강주치의 기반의 지역사회 일차 의료다.
이들 국가에서는 국민의 의료 서비스 만족도가 높고 대형 병원 환자 쏠림도 없다. 경험적·이론적으로 주치의 제도는 의료전달체계 확립 이외에도 많은 장점이 있다. 첫째, 급속한 고령화로 인한 복합만성질환 시대의 효과적 대응책이다. 둘째, 의료비 절감으로 국민건강보험의 재정적 지속가능성을 높인다. 셋째, 지역·계층 간 의료 이용의 불평등을 줄이고 건강 형평성을 높인다. 넷째, 지역소멸 위기에 대한 효과적인 대책이다. 다섯째, 감염병 위기와 의료대란 상황에 잘 대응할 수 있다. 여섯째,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한 원격의료의 도입과 효과적인 활용이 가능해진다.
이런 이유로 보건의료·경제·사회 분야의 전문가들은 주치의 제도 도입을 요구했다. 대한가정의학회도 주치의 제도 시행을 여러 차례 제안했다. 정부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1996년 정부의 주치의등록제 시범사업이 대한의사협회의 반대로 실패했고 이후에도 의료계의 입장 변화가 없자 정부는 주치의 제도 도입 대신에 고혈압·당뇨병 관리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여기에 일차 의료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하지만 이것은 일차 의료의 극히 일부분이다. 최근 의료대란 과정에서 정부가 일차 의료 강화를 거듭 강조했는데, 그것은 ‘건강주치의 제도 기반의 지역사회 일차 의료 확립’이어야 한다.
간호사의 가정 방문으로 865명을 면접 조사한 연구(봉승원 등, 가정의학회지, 2006)에 의하면, 응답자의 77%는 주치의 제도가 필요하다고 했고 50대 이상에선 91.7%였다. 부정 응답은 5.4%에 불과했다. 국민의 높은 지지에 따라 정당들도 주치의 제도 도입을 공약했다. 민주당은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노인·장애인·아동부터 도입해 전 국민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제안했고, 국민의힘은 의료 서비스 선택권을 최대한 보장하는 선에서 맞춤형 서비스가 제공될 수 있는 한국형 주치의 모델 도입을 제안했다. 그럼에도 일부 의료계를 중심으로 건강주치의 제도에 대한 오해가 존재한다.
첫째, 주치의 제도가 의료 공급의 사회화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영국의 전통적인 주치의 제도를 염두에 둔 것인데, 최근 전문가들이 주로 검토하고 있는 프랑스와 독일의 주치의 제도는 우리나라와 같은 행위별 수가제에 기반을 둔 모델로 의료 사회화와 관련이 없다.
둘째, 동네의원 대부분이 단과 전문의여서 시행이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개원 전문의 절반 정도는 주치의가 되기에 적합하다. 게다가 안과나 정신과 등의 특정 전문의원은 의뢰 관계를 통해 지역사회에서 주치의와 양립할 수 있다.
셋째, 주치의 제도의 참여 범위가 가정의학과·내과 등의 일부 의원으로 제한되면, 다른 전문과목 개원의가 타격을 받아 개원가 활성화에 역행한다는 것이다. 타당한 주장이다. 이에 대한 해법은 건강주치의 제도 참여를 모든 동네의원 의사에게 개방하는 것이다. 다만, 일차 의료의 포괄성 원칙 등을 견지할 수 있도록 참여 의사는 건강주치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
넷째, 건강증진·예방 서비스와 방문 진료 등의 주치의 서비스는 개업 의원의 인적 구성을 고려할 때 감당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있다. 동네의원의 90%가 의사 1인이 근무하는 현재 기준에서 맞는 말이다. 그러므로 건강주치의가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정부·지자체·보건소가 체계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우리나라 동네의원도 선진 복지국가처럼 2명 이상의 의사가 근무하는 지역사회 일차 의료 기관으로 차츰 바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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