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는 재구성되는 것, 우리는 모두 얽혀 있다”
“기억은 우주에 새겨지고 언젠가 우리는 과거의 유령과 마주하게 된다. ‘옛날’로 돌아가자는 권위주의적 세력이 사용하는 ‘시간성’에 도전할 필요가 있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힘과 물리적 힘(예컨대 핵물리학과 핵무기의 힘)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한국 학계의 뜨거운 관심을 받는 ‘신유물론’의 대표적 학자로 거론돼온 캐런 버라드 미국 샌타크루즈 캘리포니아대학(UCSC) 교수가 2024년 9월28일 오전 10시(한국시각) 화상 강연으로 한국 청중을 만났다. 신유물론은 자연과 사회, 인간과 비인간의 이분법을 넘어 새롭게 물질성을 사고하는 학문 분야다. ‘핵의 유령들과 기억의 장, 시간-존재를 위하여’라는 제목의 이번 강연에서 버라드 교수는 새로운 시간 개념으로 페미니즘과 과학 그리고 그 접점을 해석하며 깊이 있는 통찰을 제시했다. 행사는 한국여성학회(회장 이현재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교수)와 숙명여대 인문학연구소 인문한국사업단(단장 박인찬 영문학부 교수)이 주최하고 한국연구재단, 한겨레 경제사회연구원, 도서출판 여이연이 후원했다.
핵의 물질성은 영겁을 간다
버라드 교수는 양자물리학도이자 반핵운동가로서 1980년대 대학원생 시절부터 페미니즘과 과학의 접점에 관심을 가졌다고 밝혔다. 그는 “물리학을 사랑했지만, 물리학이 자행한 폭력적 관행에 대해서도 누군가는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버라드 교수는 핵의 평화적 이용과 무기화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점령한 유럽 최대의 자포리자 핵발전소의 예를 들었다. 격전지가 되면서 이곳의 핵발전소는 인류를 위협하는 ‘핵 화약고’가 됐다는 것이다.
“일본 원전의 핵 폐수 방류 허용 결정 또한 국경을 넘어선 문제”라고 했다. 버라드 교수는 “1946년부터 1958년 사이 미국이 마셜제도에서 70개의 원자폭탄 실험을 했다. 오늘날 핵 문제는 과거 강대국과 태평양 연안 국가의 피해를 상기시킨다”고 말했다. 양자물리학으로 탄생한 핵이 지닌 물질성은 뉴턴의 시공간 개념을 폭파하고 과거, 현재, 미래는 서로 얽히게 된다는 얘기다. 예컨대 우라늄-235의 반감기는 7억 년이고, 7억 년이 지나면 그 절반이 붕괴하며 다시 7억 년이 지나면 남은 절반의 절반이 붕괴한다. 방사성 물질은 영겁의 모든 시간에 존재하는 것과 다름없다. 핵폭발은 이처럼 ‘지금 여기’만 파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고 했다. “핵의 물질성은 시공간을 막론하고 끊임없이 우리에게 돌아와 괴롭히는 문제가 된다. 핵 폭격은 시간을 점령하고 땅을 식민화하고 폭력을 가한다. 핵폭발은 시공간-물질성을 가진 ‘기억의 장’에서 유령처럼 시간을 떠돈다. 세대를 거쳐 발현되고 ‘제때가 아닐 때’ 찾아온다.”
과학의 책임과 탈식민화… 물리학의 다른 가능성
버라드 교수는 “양자물리학 이론의 핵심에는 군사주의와 식민주의, 인종화된 자본주의가 존재한다”며 과학의 책임과 탈식민화를 강조했다. 핵물리학은 양자장 이론과 함께 발전했는데 1920년대 이후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들이 이 두 가지를 모두 다루고 있었으며 당장 전쟁에 쓸 군사 기술을 개발하는 연구와 이론물리학의 추상적인 작업을 오가면서 기술과 학문이 발전했다는 것이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한국인 4만 명을 포함해 많은 사람이 피폭돼 숨졌고, 생존자들의 세포도 작은 시한폭탄처럼 어느 순간 암으로 폭발하거나 돌연변이를 후손에게 물려줬다는 점도 일깨웠다. 특히 태평양 연안의 크고 작은 핵폭발은 식민지 역사, 인간과 비인간, 선주민과 식민지 개척자, 우라늄 광산과 핵폐기물, 지진과 땅과 바다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이는 “인간과 비인간,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이 동시에 얽혀 있다”는 점을 방증한다고 했다.
“냉전 기간에만 2500개 이상의 핵탄두가 터졌는데 이 중 압도적 다수가 선주민 땅에서 폭발했다. 객관성이란 다양한 힘들의 얽힘을 추적하는 문제이며 이것이 과학 실천의 핵심이다. 이 힘의 얽힘을 추적하고 물리학자로서 폭력의 힘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게 나의 책임이자 응답 능력이다.”
버라드 교수는 지식인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에 대해서도 경고했다. “탈식민화를 얘기할 때는 은유법이 돼서는 안 되고, 물질적이고도 구체적인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며 선주민들에게 토지를 반환하거나 생태적인 불이익을 해소하는 등의 구체적 행동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와 동료들이 설립한 샌타크루즈 캘리포니아대학 ‘과학과 정의 연구소’에서도 이러한 구체성과 물질성의 원칙을 강조한다고 밝혔다.
“아주 구체적으로 자세한 물질성을 파악하면서 역사를 배우고, 특정 위치에서 어떤 관행이 있었는지를 세세하게 파악해야 한다. 물리학은 식민주의, 제국주의, 자본주의, 인종주의 및 기타 폭력 세력을 도운 조력자의 역사를 갖고 있지만 그 내부에는 헤게모니와 권위를 흔들 수 있는 여지, 모든 존재의 파괴가 아니라 번영을 위한 급진적인 상상력이 숨어 있을 수 있다.”
모든 것은 연결돼 있다
이날 버라드 교수는 시적인 상상력을 동원하고 동양철학적 해석을 곁들이면서 핵물리학과 시간, 기억의 문제를 설명하는 데 상당히 공들였다. “소나무는 시간이다. 대나무는 시간이다. 산은 시간이다. (…) 시간이 소멸되면 산과 바다도 소멸된다. 시간은 그 자체로 존재다. 모든 존재는 시간이다.”
일본 선승 도겐의 시간론에 관한 시를 들려주면서 버라드 교수는 “시간이 미래를 향해 선형적으로 구성됐다는 전제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작동을 뒷받침한다”며 “과거와 미래가 유령처럼 얽히는 가운데 현재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으로 여러 종말이 동시 발생할 것이라며 미래가 이미 망가졌다는 인식이 있지만 이는 종말이 과거에 존재했고 지금까지 그 종말적 사건이 계속돼왔다는 점을 부정하는 일”이라고도 덧붙였다.
버라드 교수의 관점은 ‘모든 것이 연결돼 있다’는 불교철학의 인드라망 개념이나 생태적 관점과도 맞닿아 있다. 그는 시공간과 물질의 얽힘(Entanglement)을 강조하면서 ‘평평한 존재론’이 아니라 ‘유령론’(Hauntology)이라는 개념을 선보였다. 이 유령론은 자크 데리다의 이론에서 출발한 것으로, 데리다는 삶과 죽음의 이분법을 넘어, 없지만 있기도 한 유령 같은 존재들이 현실을 함께 이루고 있다고 봤다. 세상의 모든 구성 요소가 얽혀 있으며 주체와 대상, 자아와 타자,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구분은 절대적이지 않고 그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변화한다는 것이 버라드 교수의 ‘행위적 실재론’(Agential Realism) 개념이다. 이런 생각의 틀을 통해 세계를 더 복잡하고 상호의존적 관점에서 이해하게 되며, 인간 중심의 생각을 넘어 비인간 세계와 더 깊이 연관된 존재로서 자신을 인식할 수 있다.
“기억은 개별 뇌의 주름 속에 자리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 기입된 시공간-물질성의 접힘 속에, 우주의 구조 자체에 기록된다. 기억은 고정된 과거의 기록이 아니고, 세계 속에서 반복적으로 재구성되는 것이다. 어쩌면 세계 그 자체가 기억이다.”
선문답 같은 이 말은 ‘기억’이 단순한 기록이나 개인의 뇌에 새겨지는 것이라기보다 유령처럼 없는 듯이 있다가 상기되는 순간 과거를 재창조한다는 얘기로, 역사의 책임성을 강조했다. ‘급진적인 기억의 정치학’이 중요한 이유다. “기억은 물리적 구성물”로서 “만짐, 촉각”이며 타자를 접촉한다는 것은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취약성과 비가시성까지 기꺼이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고 버라드 교수는 강조했다.
“‘급진적으로 기억하기’를 통해 새로운 사고의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다. 얽힘을 추적하는 일은 기억을 재구성하는 실천이다. 이는 단순히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이 재구성은 파괴된 역사에 대한 책임을 묻고 새로운 가능성을 창출하며, 시간-존재(Time-being)가 지속될 수 있는 새로운 역사적 구성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로서 중요하다.”
버라드 교수는 존재는 그저 특정 좌표와 시공간에 의심 없이 개별적으로 놓인 것이 아니라 ‘시공간-물질성’이라는 장 속의 반복적인 얽힘 속에 변화하면서 자리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과거는 끝나지 않았고, 미래는 도래하지 않은 것이 아니며, 이처럼 ‘두꺼운 지금’(Thick-now) 안에 살아 있다는 것은 비동시성, 비결정성, 중첩, 얽힘 등 무한한 가능성을 수반한다”고 말했다.
“(나바호 자치국) 디네족 출신 시인인 제이크 스키츠는 희망을 이야기하면서 ‘깊은 시간이 땅속으로부터 뚫고 올라온다’고 표현한 적이 있다. 이는 수직으로 움직이는 시간이 수평적 선형 구조를 가진 식민주의 시간의 굳은 땅, 재난자본주의를 뚫고 올라오는 진보적 시간에 대한 서사다.”
과거로 돌아가자는 보수의 캠페인
이날 토론자로는 과학기술학 연구자인 임소연 동아대 교수가 함께했다. 임 교수는 “페미니즘과 여성들의 운동이야말로 선형적인 시공간 개념에 근거한 인류의 진보가 허구임을 폭로한 기여가 크다는 점에서, 남성 중심적 시간성을 거스른다는 점에서 오늘 강의와 연결해 생각해볼 점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버라드 교수는 과거 회귀적 보수 진영의 캠페인에 대해 덧붙였다.
“‘과거로 돌아가자’며 트럼프는 임신중지(낙태)를 불법화했다. 임신중지는 여성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인데 이를 불법화하는 일은 재생산, 임신 여부에 대한 선택 자체를 뺏어가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내가 나로서 태어나고 살아가고 죽는, 물질적인 내 몸에 대한 통제 권리를 빼앗아가는 것이다. 이는 실제로도 없었던 과거로 돌아가자는 판타지 속에 추진된다. 남성은 바깥에서 돈 벌어오고 여성은 집에서 맨발로 임신하고 자신의 주인들을 섬기는, 그런 과거로 돌아가자는 판타지다.”
버라드 교수는 물리학의 급진적 상상력을 저항과 번영의 도구로 써야 한다고 말했다. 물리학의 핵심 개념인 공간, 시간, 물질, 인과성 등은 오늘날 다른 학문 분야와 교차해 연구되고 있으며 이런 연구가 단순히 뉴턴적 아이디어를 양자물리학의 최신 버전으로 대체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억압받는 이들은 저항한다. 싸워야 할 대상에는 노예 주인들이 쓰는 도구들도 있다. (오드리 로드가 ‘주인의 도구로는 주인의 집을 부술 수 없다’고 했지만) 하지만 그 도구 또한 언제나 주인에게 100% 충성하는 것은 아니다. 물리학이 생산한 폭력성을 추적하고, 그 물질성 속에서 대안적 상상력을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상상 그 자체에 물질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는 절대 끝난 것이 아니며 우리는 끊임없이 그 과거의 유령들을 마주하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 역사의 잔해를 돌이켜보고, 유령처럼 잊힌 역사의 흔적을 풀어내야 한다. 물리학적 시공간과 물질화, 그리고 정치는 서로 분리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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