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나의 셰익스피어病 극복기

이재국·방송작가 2024. 10. 17.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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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연배우 올리비아 핫세와 레너드 위팅.

대학 졸업반, 마지막 관문은 셰익스피어 희곡 중 한 편을 필사하는 것이었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든 그렇지 않은 학생이든 무조건 셰익스피어 희곡 중 한 편을 원고지에 필사해서 제출해야만 졸업할 수 있었다.

내가 선택한 작품은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다. 원고지에 한 글자 한 글자 옮겨 적으면서 감탄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냥 눈으로만 읽었을 때는 느낄 수 없었던 글의 무게와 대사에 담겨있는 울림, 그리고 행간의 의미까지…. 셰익스피어를 왜 세계적인 작가라고 하고 ‘로미오와 줄리엣’을 왜 세계적인 명작이라고 하는지 절실히 깨달았다.

그렇게 필사를 끝내고 나는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일명 ‘셰익스피어병(病)’에 걸렸기 때문이다. 재밌는 스토리가 생각나서 글을 쓰기 시작하면 얼마 못 가 “에이, 셰익스피어보다 못 쓸 텐데… 쓰면 뭐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지없이 ‘셰익스피어병’이 내 의지를 꺾었다. 그 병은 좀 오래갔고 나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의지가 완전히 꺾여서 작가가 되길 포기하려고 했다.

그 때 나에게 힘을 준 건 대학로에서 본 진짜 재미없는 연극 한 편이었다. 너무 재미없고 스토리도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서 보는 내내 화가 났다. 그리고 열받은 마음에 집에 와서 미친듯이 글을 썼다. ‘내가 저 작품보다는 잘 쓸 자신 있다!’ 분노는 나의 힘이랄까? 꼬박 일주일 동안 밖에도 안 나가고 글만 썼고 그해 겨울 신춘문예에 응모할 작품을 완성했다.

그리고 얼마 후 TV에서 우연히 단막극을 한 편 봤는데 너무 재미가 없었다. 그때 또 나의 분노가 끓어오르기 시작했고 ‘그래, 내가 저것보다는 잘 쓰겠다!’라는 분노의 힘으로 단막극 대본을 완성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을 할 때 너무 기준을 높게 세우면 스스로 좌절할 수 있다. 거기까지 한 번에 올라가려고 하는 것 자체가 욕심이기 때문이다. 좀 치사한 방법 같지만 나보다 못하는 사람, 나보다 실력이 안 되는 것 같은 사람을 보면서 힘을 내는 것도 방법이다. 나는 별로 재미없는 작품을 거울 삼아 조금씩 성장했고 마침내 중간 정도는 되는 작가로 성장했다.

지금도 더 올라갈 자리가 남아 있음에 감사하고 오늘도 재미없는 작품을 보면서 분노의 힘을 키우며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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