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21] 시의 나라에 어서 오세요
그가 한마디
내가 한마디 가을
깊어 가누나
かれいちごわれいちごあきふか
彼一語我一語秋深みかも
예를 들면, 호젓한 가을 산 정자 같은 곳에서.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가까운 사람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그가 한마디, 내가 한마디. 많은 말은 필요 없다. 속도가 빠를 이유도 없다. 그저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천천히, 천천히. 어디선가 한 줄기 가을바람이 불어와, 낙엽 향이 진하게 밴 흙냄새가 어깨를 타고 올라오면, 이윽고 그와 나는 그윽이 깊어 가는 가을, 그 속에서 하나의 풍경이 된다. 다람쥐와 도토리와 노랗게 익은 모과와 함께. 사람 사는 모습을 잔잔하게 그려낸 하이쿠 시인 다카하마 교시(高浜虚子, 1874~1959)의 한 줄 시를 읽고 있으니, 문득 이 계절을 같이 만끽할 누군가와 함께 산책에 나서고 싶다.
그가 한마디 내가 한마디 가을. 참 멋진 시구다. 말은 본디 이렇게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리라. 나는 요즘 일본의 ‘세카이 세계’라는 잡지에 글을 연재하고 있는데, 이처럼 어떤 사람과 글을 주고받는 형식으로 쓰고 있다. 이름하여 왕복 에세이. 그가 한마디 내가 한마디, 수필을 마주 건네며 이어가는 세계다. 그는 이번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를 비롯해 이상, 조세희, 배수아, 황정은, 정세랑 등 한국 소설가들의 작품을 유려한 일본어로 옮기고 있는 번역가 사이토 마리코씨. 서울에서 유학하며 한글로 쓴 시가 ‘단 하나의 눈송이’(2018·봄날의 책)라는 시집으로 국내에 발행된 시인이기도 하다. 그에 따르면, 한국은 공기 중에 ‘시성분(詩成分)’이 가득해서 거리를 걷기만 해도 시를 호흡하는 기분이 든다고 한다. 자신이 쓴 한글 시는 서울 구석구석에 떠다니던 시가 몸에 쌓여서, 그걸 그저 뱉어낸 것일 뿐이라고.
그래요? 새삼 이 가을, 눈을 감고 가슴을 활짝 열며 서울 냄새를 맡아본다. 이 공기에 산소, 질소, 이산화탄소와 함께 시가 포함되어 있었다니. 이 도시에 익숙해진 나로서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렇지만 도서관 서가에 가면 지난 수십 년간의 시집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고, 서점에는 재미있어 보이는 신간 시집들로 가득하며, 메일함 속에는 모 출판사에서 보내주는 오늘의 시 편지가 잔뜩 쌓여 있으니 어쩌면 나도 공기를 마시듯 시를 마시고 있었을지도.
올해 초부터는 마음 맞는 사람들과 작은 시 쓰기 모임도 하고 있는데, 그러고 보면 나는 정말로 내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아름다운 시의 나라에 살고 있었구나. 간간이 이 지면으로 이웃 나라의 한 줄 시를 읽으러 찾아오시는 여러분도 시의 공기를 마시고 계십니다. 어서 오세요, 시의 나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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