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고독하고 때론 달콤하게… 네덜란드 거장의 ‘사랑의 밀어’

이태훈 기자 2024. 10. 16.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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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머발레’의 두 주역 김지영·이동훈
서울시발레단의 네덜란드 무용가 한스 판 마넨 안무작 ‘캄머발레’ 아시아 초연 모습. 사진 맨 왼쪽 오렌지색 의상을 입은 무용수가 이동훈, 맨 앞 검은 의상을 입은 무용수가 김지영이다. 국립발레단의 ‘황금 듀엣’이었던 김지영과 이동훈은 9~1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무대에 함께 올랐다. /세종문화회관

두 사람이 한 무대에 선다는 것만으로 오랜 발레 팬들의 가슴은 설렜다. 2010년대 ‘신데렐라’ ‘로미오와 줄리엣’ ‘지젤’ 등 국립발레단 대부분 작품에서 주역 무용수로 호흡을 맞춰 ‘황금 듀엣’으로 불렸던 김지영(46)과 이동훈(38). 두 무용수는 지난 9~11일 서울시발레단의 첫 해외 라이선스 작품인 ‘캄머발레(Kammer Ballett)’로 함께 서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무대에 섰다. 네덜란드 무용가 한스 판 마넨(92)이 안무한 이 작품이 공연되는 것은 아시아에서 처음이다.

남녀 각 4명씩 총 8명의 무용수는 남녀 각각 2명씩 검은색, 오렌지색, 노란색, 진홍색의 레오타드(상·하의가 이어진 옷)를 입고 무대에 올랐다. 무용수들은 닫힌 방 안에서 때론 신경을 곤두세우고 때론 애정을 표현하는 남녀들처럼, 말 대신 춤의 언어로 대화하듯 무대를 이끌어간다. 김지영은 블랙, 이동훈은 오렌지. 검은색 레오타드의 김지영은 이 단막 발레의 주인공으로 작품을 열고 닫았다. 그는 한 가닥 사랑의 갈망에 잠시 몸을 맡겼다가 끝내 홀로 길을 떠나기까지, 한 여성이 품을 수 있는 열정과 고독의 정서를 오로지 춤으로 무대에 뿜어냈다. 김지영의 몸짓을 따라 관객들은 ‘아…’ 혹은 ‘하…’ 같은 탄성을 연발했다. 로맨틱한 ‘오렌지’ 이동훈은 마치 파트너 발레리나와 사랑의 밀어를 주고받는 로맨스 영화의 남자 주인공처럼 달콤했다.

네덜란드 거장 한스 판 마넨이 안무한 컨템퍼러리 발레 작품 '캄머발레'에 함께 출연한 무용수 김지영(오른쪽)과 이동훈. /세종문화회관

공연 전 만난 두 사람은 여전히 정다운 남매 같았다. 둘은 국립발레단 시절인 2012년 함께 세계 무용계 최고 영예 브누아 드 라 당스 후보에 오르고, 볼쇼이 발레단 초청으로 연말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 ‘스파르타쿠스’ 무대에 주역으로 함께 서기도 했다. 네덜란드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로 있던 2007년 판 마넨의 직접 지도로 ‘캄머발레’를 공연했던 경험이 있는 김지영은 “무용수가 가진 에너지, 인간의 감정과 관계성의 정서가 과장 없이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오는 작품”이라고 했다. “가구로 치면 화려한 장식의 로코코 스타일보다 북유럽 미니멀리즘에 가깝다고 할까요.”

이동훈은 “영상만 보고 쉽게 할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디테일이 엄청난 작품이어서 힘들었다”며 엄살을 부렸다. “누나 연습하는 걸 보는데 누나 나이를 깜빡 잊어버렸어요. 여전하더라고요.” 김지영은 이동훈에 대해 “워낙 춤에 대해 본능적인 데가 있는 무용수”라고 칭찬했다. “판 마넨이 보낸 협력 연출가(stager)가 동훈이 춤을 보고 ‘뷰티풀 댄서!’라고 환호하더라고요. 아무나 그런 칭찬을 받는 게 아니죠.”

발레리나 김지영(앞쪽 검은 의상)의 한스 판 마넨 안무작 '캄머발레' 공연 모습. /세종문화회관

김지영은 김주원, 김용걸, 이원국 등과 함께 국립발레단의 최태지 전 단장이 불씨를 댕겼던 한국 발레 르네상스의 주인공이었다. 당시 이동훈은 비보이 출신으로 17세에 발레를 시작해 해외 콩쿠르를 휩쓴 발레 신성. 아이돌 뺨치는 외모에 뛰어난 실력까지 갖춰 국립발레단 인기와 발레 대중화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함께 활동할 때 최태지 단장은 경험 많은 김지영에게 신예 이동훈을 자주 커플로 붙여줬다. 이동훈은 “‘무서운 누나’였다. 자주 혼났지만, 남자 무용수에게 가장 중요한 파트너링 기술은 대부분 누나에게 배운 것”이라며 고마워했다.

‘캄머발레’는 ‘백조의 호수’나 ‘호두까기 인형’ 같은 고전 발레에 익숙한 국내 관객들에겐 아직 낯선 컨템퍼러리 발레다. 국립발레단을 나온 뒤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최근까지 오클라호마 털사발레단에서 두 시즌간 무용수로 활동한 이동훈은 “미국 발레단은 대부분 6대4 혹은 7대3 정도 비율로 컨템퍼러리 발레 작품을 더 많이 공연한다”고 했다.

발레리노 이동훈(뒷쪽 오렌지색 의상)의 한스 판 마넨 안무작 '캄머발레' 공연 모습. /세종문화회관

“고전의 벽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새롭고 도전적인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관객은 그걸 그대로 즐겨요. 자유로운 분위기다 보니, ‘호두까기 인형’을 공연해도 캘리포니아에선 서부의 총잡이, 오클라호마에선 소몰이 카우보이 식으로 지역별로 특화된 안무를 넣는 데도 과감합니다.” 그는 “2022년 시즌 개막 때 창작 컨템퍼러리 작품 공연에선 힙합 춤을 춘 적도 있다”며 웃었다.

김지영은 컨템퍼러리 발레 관람을 “현대미술 전시를 보러 가는 마음”에 비유했다. “루브르 박물관 같은 데서 보는 고전 미술품도 아름답지만, 뉴욕 현대미술관(MOMA) 같은 데서 알쏭달쏭한 현대미술 작품을 보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잖아요. 예술에 어디 정답이 있나요.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면 발레가 더 즐거워질 겁니다!”

☞캄머발레

현대 발레의 ‘살아있는 전설’인 네덜란드 무용가 한스 판 마넨(92)의 안무작. 사람 사이의 관계에 천착하며 무용수 개인의 기량이 빛나도록 표현하는 그의 안무 성향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네덜란드국립발레단 예술감독 시절, 당대의 스타 무용수 8인에게 각각의 개성을 살린 춤을 부여해 만들었다. 1995년 초연부터 “숨막히게 아름다운, 거장의 정신이 깃든 보석”(무용평론가 아스트리드 판 리우웬)으로 극찬 받았다. ‘캄머(Kammer)’는 독일어로 방(chamber). 닫힌 방 안에서 때론 신경을 곤두세우고 때론 애정을 표현하는 남녀들처럼, 무용수들은 말 대신 춤의 언어로 대화하듯 무대를 이끌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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